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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 축구

로이 킨 복수극 해부 ② : 프랑스 월드컵 결장의 가능성, 1997년 10월

by wannabe풍류객 2011.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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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0 - 로이 킨 복수극 해부 ①: 충돌의 시작, 1997년 9월 27일

지난번 글에 이어 로이 킨이 부상을 당한 직후 며칠 동안 그의 부상에 대한 우려가 어떻게 깊어지는지 그 과정을 보기로 한다. 

1997년 9월 30일 ~ 10월 3


리즈-맨유의 경기 후 알피 홀란드가 지적했듯이, 로이 킨은 맨유의 주장이었다. 킨은 전 시즌에 은퇴한 에릭 칸토나의 뒤를 이어 주장이 된 것이다(참고로 칸토나는 스티브 브루스의 후임 주장이었다). 퍼거슨 감독은 로이 킨에게 주장 완장을 채우면 성질이 죽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즌이 시작된지 두 달도 되지 않아 로이 킨은 충분히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고, 자초한 무릎 부상은 최악의 결과였다.

27일의 리그 경기 이후 이틀이 지난 29일 밤 로이 킨은 연골 조각을 제거하는 작은 수술을 받았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핏덩어리와 크게 부어오른 상처 때문에 정확한 부상 정도의 파악이 불가능했는데 그 수술을 하며 무릎 인대가 망가진 것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당시 무릎 인대 부상은 최악의 부상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천재이자 악동이었던 개스코인, 프리미어 리그 역대 최고의 스트라이커라 할만한 시어러도 인대 부상으로 크게 고생했다. 같은 아일랜드 축구 선수였던 니얼 퀸은 양쪽 무릎 인대를 모두 다친 경력이 있는데, 그는 5개월 정도만에 부상에서 복귀하곤 했다. 그러나 퍼거슨이 희망했듯 의학 발달의 결과 빠른 치유의 가능성은 높아지긴 했다. 

이미 주중의 유벤투스와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 결장이 문제가 아니었다. 무릎 인대 부상인 것이 확인되며 언제 복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려는 깊어져 갔다. 10월 1일 미러 기사에서는 3개월 결장이 제목으로 나왔다. 그러나 2일에 재차 검사가 있은 이후 10월 3일 기사들은 로이 킨이 이번 시즌, 그러니까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97-98 시즌의 잔여 경기 전체를 결장한다거나, 10개월 결장할 것이라는 진단이 내려졌음을 전한다. 

맨유는 킨이 빠졌지만 OT에서 유벤투스에 3:2로 역전승을 거뒀다. 킨의 이야기를 잠깐 떠나면 이 경기는 베컴, 델 피에로라는 당대 골든 보이들의 대결이기도 했다. 베컴은 빅토리아와 결혼하기 전으로 그녀와 '우정' 반지를 교환한 상태였고 델 피에로는 싱글이었다. 14년전 과거긴 하지만 둘이 버는 돈은 요즘 기준으로는 겸손한 수준이었다. 베컴의 연봉은 40만 파운드로 보너스까지 포함해도 50만 파운드였고, 델 피에로는 기본 80만 파운드(유벤투스 최고액)에 스폰서십을 통해 백만 파운드를 더 벌었다고 한다(미러, 97. 10. 1).

델 피에로는 그 경기에서 20초만에 선제골을 넣었고, 맨유는 셰링엄, 스콜스, 긱스의 골로 역전에 성공했고 유벤투스는 막판 지단의 프리킥으로 차이를 한 골 차로 줄였다. 데샹의 퇴장이 유벤투스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맨유가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킨의 시즌 아웃은 퍼거슨의 두통거리였다. 일각에서는 맨유가 킨의 대체자를 영입해야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퍼거슨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킨 없이 선수단을 운용하겠다고 말했다.

로이는 뛰어난 선수고 그를 뛰어넘을 사람은 많지 않아요.

우리는 킨 없이 싸울 겁니다. 이적 시장을 찾지 않을 거에요. 분명 키노의 부상은 우리 팀에 큰 손실입니다. 그와 같은 최고의 선수가 없는 것은 견딜 수 없어요. 그러나 지금 당장은 그의 대체자를 물색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 선, 97. 10. 3]

맨유만큼이나 혹은 거의 분명히 맨유 이상으로 로이 킨이 필요했던 아일랜드 축구 대표팀의 손실도 분명했다. 로이 킨이 부상을 당한 상황에서 아일랜드는 98년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 루마니아에 이어 조 2위였다. 루마니아와의 마지막 경기를 남기고 있었지만 승점 차가 워낙 커서 역전의 가능성은 없었다(킨은 이전에 카드를 받아 어차피 루마니아 경기에 나올 수 없었다). 아일랜드는 3위 리투아니아와 승점은 비슷했으나 골득실의 여유로 2위 자리를 내줄 걱정도 없었다. 그러므로 아일랜드가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기 위한 플레이오프 진출은 확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로이 킨은 두 번의 중요한 플레이오프 홈 앤 어웨이 경기에 나올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97년, 아일랜드 대표팀의 로이 킨 (이미지 출처는 링크)

아일랜드의 믹 매카시 감독도 킨의 부재를 뼈아프게 느꼈다. 그러나 킨이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아일랜드가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고, 킨이 잘 회복할 경우 내년(98년) 여름의 월드컵 본선 때 킨이 참가하기를 바랄 뿐이었다(아이리쉬 타임스, 97. 10. 3). 그러나 10월과 11월에 걸친 플레이오프에서 아일랜드는 종합 스코어 2:3으로 벨기에에 패하며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아마 로이 킨이 있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적은 점수 차이의 결과였기에 아일랜드의 아픔은 더 컸을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나야 할 일이지만 대표팀의 월드컵 진출 실패에 영향을 준 킨의 부재는 이어서 그 시즌 맨유의 리그 성적에도 영향을 주었다.

다음에는 시즌 초에 시즌 아웃의 부상을 당한 킨의 자세에 대해 정리해보기로 한다. 

2011/08/17 - 로이 킨 복수극 해부 ③ : 복수심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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