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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아담 스미스의 진면목

by wannabe풍류객 2011.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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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시장 중심의 경제학의 원조처럼 알려진 아담 스미스. 경제적 자유주의는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시장에 대한 공적 규제를 악으로 여기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최근의 신자유주의는 그 극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 세계 경제는 투기 세력의 장난에 놀아나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아담 스미스가 이런 혼란의 원흉인가.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만 들어봤던 시절에는 그렇게 오해를 할 법도 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은 스미스의 핵심적인 개념이지만 '국부론'에 단 한 번 나올 뿐이다. 

여차저차 이번 학기에 아담 스미스에 대해 제대로 읽어보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논문 중심의 2차 문헌들을 읽어오다 평이 괜찮은 책을 발견하여 사서 읽었다. 바로 아래의 도메 다쿠오의 '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이다.

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
국내도서>경제경영
저자 : 도메 다쿠오 / 우경봉역
출판 : 동아시아 2010.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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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 - 10점
도메 다쿠오 지음, 우경봉 옮김/동아시아

두 달 전에 분업의 원리를 설명한 '국부론'의 맨 앞 내용은 읽은 바 있다. 그런데 워낙 빙산의 일각을 본 것 뿐이라 그것으로 스미스를 좀 안다고 말하기는 부끄러운 일이다. 그 대목만 읽을 경우 생산성을 높이 기 위해 분업을 해서 노동자들이 특화된 작업만 해야 한다는 주장만 알 수 있다. 단순 작업을 하루 종일 하는 단조로움, 비인간성에 대한 보완이 결여된 생산성 향상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의문이 자동적으로 도출된다. 그러나 스미스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감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메 다쿠오 교수의 책은 그 보완책, 그리고 스미스의 사상 체계가 상당히 정교함을 잘 설명해준다. 

이 책은 스미스가 남긴 두 개의 저작이자 대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을 원문을 조금씩 인용하여 쉽게 설명하고 있다. 스미스 연구자들이 두 저작을 마주하며 느끼는 당혹감 중의 하나는 상충되는 것으로 보이는 도덕감정론의 동감(sympathy)의 원리와 국부론의 이기심을 어떻게 조화를 시켜 이해하느냐이다. 다쿠오 교수는 그 난관을 아주 쉽게 넘어버린다. 국부론의 이기심은 도덕감정론의 동감을 전제한 상태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도덕감정론이 몇 년 먼저 나왔으므로 국부론이 그 연장선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 두 작품이 5회씩의 개정판을 냈는데 핵심 주장이 바뀌지 않았다면 한 개인의 사상 체계에서 두 작품이 모순 관계라고 볼 수도 없다. 

동감의 이기심. 언뜻 보기엔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동감이라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동감은 동정이 아니다. 다른 인간들이 나와 같은 인간으로서 비슷한 감정을 가질 것으로 예상한다는 정도의 의미다. 이것은 스미스의 생각에서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사회적 존재로 인간의 한계를 명확히 규정했기 때문이다. 개인의 이기심은 다른 인간을 무시한채 무한히 확장하기만 할 수는 없다. 사람은 주변에 있는 가족, 친구, 동네 사람, 경쟁자들과 말과 행동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이기심이 앞서긴 하겠지만 행동에 일정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기심은 이러한 상호작용이 제도화된 법과 규범의 범위 안에서 최대한 자유롭게 발휘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미스가 이기심 자체를 긍정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이기심을 인간의 본성처럼 주어진 것으로 파악한다. 동감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도메 교수의 책을 통해 이해한 스미스는 인간이 왜 이기적인지, 왜 동감을 하게 되는지에 대한 인간 본성의 기원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는다. 다른 책에서는 스미스가 현실 속 인간의 행동을 관찰하여 내린 결론이라고 이해한 것을 보기도 했다. 

스미스는 개인들이 자기 스스로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결과가 결국 조화를 이뤄 사회, 국가의 부의 증가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들은 국부 증가 때문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할 뿐인데 그것이 결과적으로 국부를 최대로 늘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간섭이 최소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기원을 아담 스미스에서 찾는 것은 타당한 일이다. 다만 무조건 시장을 옹호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된다. 

국부론의 주장 중 상반된 평가를 받는 대목 중 하나로 빈곤층이 최소 수준의 생계비를 벌 수 있다면 된다는 대목이 있다. 어떤 논문은 이것이야말로 스미스의 한계라고 지적하지만, 도메 교수는 정반대의 주장을 한다. 스미스가 인간은 생계를 해결할 수준의 부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봤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불필요하게 많은 부의 추구는 허영이며, 인간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음의 평온은 이 책에서 매우 강조되는 스미스의 사상이다. 사회 전체의 소득 수준에서 하위에 속한다 하더라도 먹고 사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면 마음이 편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끝없는 소비, 더 사치스러운 것에 대한 소비만 강조하는 요즘 사회에는 맞지 않는 주장이다. 그러나 농업, 제조업, 무역의 순서로 강조한 스미스의 생각에서 알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듯이 인간이 자신의 노동을 통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면 삶의 거대한 목표를 이룬 것이다. 요즘엔 굶어죽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말을 흔히 하지만 모두가 생계 이상의 부를 얻겠다고 달려드는 와중에 사회의 모두가 조바심과 불안감에 떨 뿐이다. 

글을 더 길게 쓸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멈추고 정리를 해보기로 한다. 이 책은 2008년, 바로 세계 금융 위기의 해에 출간되어 일본에서 극찬을 받았다. 단순히 경제학자의 사상을 쉽게 쓴 교양서에 그칠 수도 있었지만 금융위기와 맞물려 경제로 인한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를 이 책에서 찾을 수 있다는 인식이 있었을 것 같다. 스미스는 인간을 먹고 살게 하는 농업을 중시할 정도로 철저히 18세기의 사람이었다. 당시는 금융이 중요한 시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사적 영역의 금융은 국가를 비롯한 공적 영역의 규모를 넘어선지 오래다.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먹고 사용하는 실물이 아닌 화면 속의 숫자의 흐름이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비탄에 빠뜨리고 있는 현실을 본다면 스미스는 금, 은, 화폐에 대한 추구를 비판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 이상으로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했을 것이다.  

석유 고갈 이후의 완전히 달라진 삶에 대한 책을 읽은지 얼마 되지 않아 우울하던 차에 마음을 더 크게비우고 평온을 얻을 정도의 경제적 수준에 만족하라는 스미스의 말에 위안을 얻는다. 그런데 인플레이션의 시대엔 최저 생계비도 오르지 않는가? 절대주의 시대보다는 더 평등한 사회를 구현하려고 했던 스미스의 사상을 자본주의로 빈부의 격차가 늘어만가는 시대에 적용하는 것은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그 정수를 이해하고 창조적으로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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