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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열기가 좀 가라앉았을 터이다. 그래서 글을 써본다.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앞서가다 실점하고 연장 초반 오심에 의한 페널티킥으로 패색이 짙었고 120분이 다 되기 직전 극적인 동점골이 터지며 승부차기까지 갔던 승부. 그러나 모두가 다 알듯 세 명의 키커가 모두 골망을 흔드는데 실패하며 너무나 기막히고 허망하게 일본대표팀에 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극적인 승부의 흐름은 기성용의 원숭이 흉내 세러모니를 더 논쟁적으로 만들었다.
전반전 페널티킥을 성공한 기성용은 처음에 박지성이 달려들 때도 턱을 아래로 내리며 원숭이 흉내를 내는 것 같았고, 이후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고 손으로 빰을 긁으며 자신의 세러모니의 의도를 분명히 했다. 많은 논란이 일자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관중석의 '욱일승천기'를 보고 눈물이 났다는 식의 해명을 내놓았고, 언론사의 비판에 대해서 자신도 국민의 한 명이라며 재차 반론을 제기했다.
기성용의 원숭이 세러모니는 처음에 인종차별적 행동이 아니냐며 논란을 일으켰지만, 이후 기성용이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이었던 깃발 욱일승천기(욱일기)에 대응했던 것으로 이해되면서 일본 관중들에 대한 비난으로 여론이 바뀌었다. 게다가 김연아 악마 가면까지 있었다는 주장이 나오며 기성용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애국자로 추앙받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처음부터 의문을 품게했는데, 기성용이 왜 하필 원숭이 흉내를 냈는가이다. 한국인이 일본인을 원숭이라고 놀리는 게 근래의 일인지 잘 모르겠는데 대개의 의견은 서양에서 먼저 일본인을 원숭이로 불렀다는 것이다. 2차 세계 대전을 통해 교전 상대를 향한 인종 비하는 더 감정적인 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전적으로 별 차이가 없을 한국인이 일본인을 원숭이라고 부르는 건 좀 이상하다. 객관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예전부터 한국인이 일본인을 원숭이라고 비하한 관행이 있으니 한국 내에서는 맥락을 벗어난 게 아니지만 기성용이 경기 화면이 세계로 중계될 걸 알았다면 더 신중해야 하지 않았을까. 서양의 백인들이 그 화면을 보고 기성용이 의미한 바를 알게 되었다면 뭐라고 생각할까. 비웃음을 당할 일이다(영어로 해설된 경기 중계를 봤는데 기성용의 세러모니 때는 침묵이 흐를 뿐이었다. 무슨 의미인지 몰랐으리라).
차라리 이런 생각도 해봤다. 기성용이 스코틀랜드 프로팀에서 축구를 하며 원숭이라는 놀림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렇다면 자신이 원숭이지만 이렇게 골도 넣을 수 있다고 풍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선수 자신의 트위터를 통한 해명을 감안할 때 이런 의도였을 가능성은 없다. 또 자신이 그런 수모를 겪었다면 더더욱 같은 행동을 다른 대상에게 해서는 안 된다.
백번 양보해 기성용이 일본인 관중석의 욱일기 때문에 그 세러모니를 했다고 치더라도 현재로서는 의문만이 남을 뿐이다. 나 자신이 경기를 생중계로 봤지만 욱일기나 연아 가면을 본 일은 없다. 관심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인데 문제는 아무도 못봤다는 점이다. 밝혀진 바로는 연아 가면은 예전 한일간 축구 경기 때 있었던 일이고, 당시에 악의적인 의도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또 욱일기가 며칠 전 경기에서 등장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기성용의 말 뿐이다. 나도 경기 영상을 빠르게 돌려보며 검색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며칠간 언론사들은 잘못된 사진 이미지들을 천편일률적으로 사용했다. 그래서 문제는 기성용이 정말 욱일기를 봤는가의 문제로 귀착되고 만다.
이렇게 글을 쓰는 와중에 대한축구협회, 아시아축구연맹 등의 공식 설명, 반응이 기사화되었다. 축구협회는 기성용이 스코틀랜드의 인종주의에 대항하는 의미로 원숭이 흉내 세러모니를 했다는 설명을 내놨고, 일본축구협회와 아시아축구연맹 모두 이 점을 이해하고 더 이상 문제삼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역사를 볼 때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있으므로 이런 식으로 넘어가는 게 좋은지 모르겠다. 하지만 기성용이 트위터에 남기고 여전히 지우지 않은 두 번의 트윗은 다른 의도가 있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한 선수의 유치한 행동이 괜한 양국간 소동으로 번졌던 이 경험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선수들, 언론 그리고 인터넷의 모든 사용자가 유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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