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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 축구

[월드컵] 축구가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하는가

by wannabe풍류객 2010.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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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도발적인 제목을 가진 글을 마주하게 되었다. 대학(원) 후배가 나에게 읽어보고 의견을 말해달라고 요청한 글이다. 


축구를 소재로 석사 논문을 쓴 나에게 포린 팔러시 쯤 되는 저널에서 축구가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는 글이 게재되었으니 한 번 읽어보시오라는 요청으로 들렸다. 저자는 파이낸셜 타임스의 저널리스트다. 일전에 파이낸셜 타임스를 평소에 보던 다른 후배가 그 신문에 월드컵에 대한 심도있는 글들이 많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여전히 스포츠가 정치적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아주 많은데 저 기사를 쓴 사람은 무슨 생각일까 궁금했다. 쭉 읽어본 결과 그다지 틀린 말은 없었다. 

South Korean soccer fans celebrate after South Korea's Lee Jung-soo scores a goal as they watch a live TV broadcast of their 2010 World Cup Group B soccer match against Nigeria in Durban, on streets in the central Seoul June 23, 2010. South Korea drew 2-2 in a tense match with Nigeria to advance to the second round of the World Cup on Tuesday. REUTERS/Jo Yong-Hak (SOUTH KOREA - Tags: SPORT SOCCER WORLD CUP)

이제 월드컵 참가/개최국들 중 파시즘과 군부 독재에 시달리는 국가들은 거의 없고, 축구와 민족주의의 끈은 약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월드컵 경기에서의 패배는 온 국민이 함께 흥청망청 뛰놀 수 있는 기회가 조금 줄어든 것에 불과하다. 한국에서의 거리 응원은 정확히 그런 심정의 발현이었다. 2002년 이후 축구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대거 거리로, 집결지로 모여 들었다. 대기업들의 마케팅 전쟁이 벌어졌고, 소규모 상인들은 대목을 누렸고, 적지 않은 여성들은 자신의 몸을 노골적으로 광고했다. 민족적 전쟁 대신 상업적 내전이 치열했다(물론 글로벌 수준의 상업적 세계 대전도 있었다). 경기 결과 따위는, 그저 놀 수 있는 좋은 핑계거리의 수를 좌우하는 것에 불과했는지 모른다. 

기사의 후반에 월드컵의 정치성이 경기를 통해 대결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발현되는 시대가 지났고 이제 대회를 개최하는 국가들에게 가장 큰 의미를 갖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은 아주 공감이 되는 부분이다. 전쟁의 가해자, 학살자의 나라 독일이 2006년 월드컵을 통해 공공장소에서 '독일'을 자유롭게 목청껏 소리 높여 외칠 수 있는 것은 큰 변화다. 인종 차별의 상징과 같은 남아공에서 흑인들이 열등한 존재라고 낙인찍혔던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박해자이자 억압자인 국가 남아공에 대해 '자부심'을 느낄 수 있게 된 것도 큰 수확이다. 

South African Ambassador in Argentina, Anthony Leon (3rd L), along with South Africans residing in Argentina blow a vuvuzela during a celebration for the 2010 World Cup at Plaza San Martin in Buenos Aires June 10, 2010. Vuvuzela derives from the word vuvu which in the Zulu language means to make noise. REUTERS/Martin Acosta  (ARGENTINA - Tags: SPORT SOCCER WORLD CUP)

생각해보면 2002년 월드컵이 공동 개최된 한국에서 정확히 그런 효과들이 이미 있었다. 군부 독재가 끝나고 10년 이상이 훌쩍 지난 시기에 한국인들은 '대~한민국!'을 박수로, 고함으로 환호했다. 예기치 못한 히딩크 매직으로 대한민국 대표팀은 4강까지 진출했고 한국인들의 자부심은 끝없이 상승했다. 아직 세계 최고의 선진국은 아닐지라도 한국이, 한국인임이 자랑스럽다는 말을 쉽사리 들을 수 있었다. 

2002년 월드컵이 아니었다면 IMF 구제 금융의 강펀치를 맞고 추락한 국가 위상과 국민들의 사기가 어떻게 그렇게 극적으로 높아질 수 있었을까. 남아공의 현명한 사람들이 월드컵 준비에 투입된 천문학적 자금을 생각하면 월드컵을 치르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하듯, 한국에서 여전히 월드컵 경기장이 적자 경영을 면치 못하고 있듯이 월드컵이라는 메가 이벤트는 재정 부담을 안기지만 그것을 만회하고 뒤덮을 말한 정서적 효과가 있다. 

위 기사의 필자는 사실 과거 70년대 이전의 축구를 설명하던 정치적 해석이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과거의 틀로는 축구가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고 말한 것이다. 물론 그렇게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시대가 변한 것은 분명하다. 축구는 다른 방식으로 현재의 정치적 현실을 반영하고, 때로 정치적 현실을 극적으로 바꾸기도 한다. 그리고 풋볼을 굳이 싸커로 표기한 포린 팔러시의 오만함이 축구가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제목을 만들어낸 것 같다. 미국인들은 공부를 더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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