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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 축구

수아레스 징계 과정의 쓴 맛

by wannabe풍류객 2012.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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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수아레스가 파트리스 에브라에게 인종차별적 말을 했다는 이유로 8경기 출장정지에 벌금까지 부과된 징계 결정이 내려졌고, 리버풀이 항소를 포기하며 이 사건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이제 이 문제를 다시 꺼내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일이 되어 버렸다. 여전히 할 말이 많은 리버풀/수아레스 지지자들이 많으나 대다수 사람들은 이제 잊어버리자고 말한다. 

그간 이 사건에 대해 글을 여러 번 적었기에 또 글을 쓰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 많은 사람들의 의견처럼 수아레스 징계 사건에 대한 이런 글은 그만 써야 할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꼭 필요한 말은 하고 지나가야 한다.

본격적으로 글을 전개하기에 앞서 수아레스가 잘못했다는 것은 나도 확실하게 인정하고 넘어간다. 아무리 치열한 경기 중이라고 해도 하지 말아야 할 말은 있다. 에브라가 남미인이라고 자신을 부른 것에 대해 답하는 과정에서 네그로라고 했으므로 친한 상대에게 하는 것처럼 친근한 표현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 스스로 '네그로'라는 말을 한 것을 인정한 이상 또 그것이 잘못인지를 판단하는 곳이 잉글랜드의 FA인 이상 규정에 따라 기술적으로(technically) 징계는 피하기 어려웠다. 

이 질문을 꼭 하고 시작해야겠다. 수아레스는 인종주의자? 거짓말쟁이? 위선자? 바보?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FA와 독립규제위원회(IRC), 그리고 에브라도 수아레스는 인종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수아레스가 에브라의 피부색을 비하하는 말로 '네그로(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영어의 '니그로'가 아니다)'를 수차례(최종 판결로는 7번) 썼다는 혐의가 인정되었다. 만약 수아레스가 흑인 선수에게 조롱하는 의미로 네그로를 반복적으로 쓸 정도로 악질이라면 인종주의자 아닌가? 왜 수아레스가 인종주의자라는 혐의는 두지 않는가.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수아레스 자신이 인정하듯이 할아버지가 흑인이었다고 하고, 수아레스의 부인은 수아레스의 머리가 검다는 이유로 그를 '네그로'라고 부른다. 즉 수아레스는 스스로 '네그로'적인 정체성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 또 그렇기 때문인지, 어렸을 때 어렵게 살았기 때문인지 그동안 각종 차별을 없애기 위한 사회 운동을 후원하고 참여한 경력도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영국의 맥락을 봐야한다며 인정하지 않지만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던 우루과이에서는 네그로가 영국보다 비교할 수 없이 쉽게, 어떤 차별의 의미를 담지 않고 사용될 수 있었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다. 만약 이런 것들이 감안되지 않았다면 수아레스는 이미 10월에 징계를 받았어야한다. 

수아레스가 리버풀과 맨유의 경기가 있었던 10월에 징계를 받지 않았다는 대목은 매우 중요하다. 며칠 전 IRC의 보고서에서 명확하게 드러나지만 이미 경기 당일에 수아레스는 자신이 에브라를 '네그로'라고 부른 점을 인정했다. 리버풀의 감독 케니 달글리쉬와 축구 디렉터 데미앙 코몰리가 모두 수아레스가 '네그로'라는 말을 쓴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더 정확히는 스페인어를 할 수 있는 코몰리만이 수아레스와 상황에 대한 대화를 했고, 케니는 그 말을 전해 들었다). 만약 수아레스가 영국 사회에서 '네그로'라는 말을 쓰는 것이 문제가 될 것임을 알았다면 왜 솔직히 인정했을까? 몇 번 지적된 바이지만 수아레스는 침묵을 지킬 수도 있었다. 이번 사건이 영국 축구계에서 어떠한 인종차별적 언어/행동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엄숙한 선언일 수도 있지만 정반대로 유사한 사건이 일어날 경우 누구도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게 만드는 역효과도 예상된다. 에브라의 증언이 가장 강력하고 거의 유일한 증거인 상황에서 만약 수아레스가 입을 다물었다면 과연 징계가 가능했을까? 수아레스는 솔직함의 대가로 징계를 받았다.

다시 정리하면 이미 리버풀과 맨유의 홈경기가 있던 날 경기 후 에브라, 퍼거슨, 맨유의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를 쓰는 선수들(데 헤아 제외), 긱스, 주심 마리너, 제4심 다우드, 수아레스, 리버풀의 팀 관리 매니저 하판, 코몰리, 케니는 정확한 단어나 문장은 몰랐어도 수아레스가 에브라의 인종과 관련하여 말한 것을 알았다. 심지어 그 날 수아레스도 네그로라고 한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에브라가 프랑스 TV와의 인터뷰를 통해 '열 번도 넘게' 인종차별적인 말을 들었다고 말하자 수아레스는 SNS를 통해 그 사실을 부인했다. 이미 팀의 감독과 수뇌부에 네그로라는 말을 썼다고 인정했지만 인종차별적인 의도는 없었다, 이것은 수아레스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경기 당일 주심에게 말하며 FA에 보고될 것을 안 상황에서 리버풀과 수아레스가 발을 빼고 변명을 한다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순진한 생각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수아레스의 맥락에서 '네그로'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리버풀 측에서 믿었다는 것이 맞다. 

수아레스는 위선자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다. 잉글랜드에서 네그로라는 말이 그렇게 문제될지 모른 것은 그냥 모른 거지 수아레스의 잘못이라고 보긴 어렵다. 문제를 지적하려면 리버풀 측의 관리 소홀에서 찾거나 혹은 그렇게 인종차별을 몰아내기 위해 캠페인을 줄기차게 했던 FA의 그간의 노력이 내실이 없었을지 모른다는 점을 봐야 한다. 리버풀은 수아레스가 글렌 존슨에게 네그로라고 말할 때 말렸어야 했는지 모른다. FA는 진작에 다른 문화권의 선수들이 프리미어 리그에 올 때 문화 교육을 실시했어야했는지 모른다. FA는 이번 사건을 통해 인종차별을 근절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에 못지 않게 글로벌 게임인 프리미어 리그가 편협한 자체 기준을 갖고 있다는 혹은 EPL이 지나치게 경직된 판단이 적용되는 리그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이 사건을 잘 모르고 그냥 수아레스가 흑인인 에브라를 야비하게 놀린 것으로만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겠지만 조금이라도 관심있게 본 사람들은 수아레스를 동정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최소한 FA가 피파와의 알력 다툼의 일환으로 수아레스에게 과도한 징계를 내렸다는 의견은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에브라가 프랑스 TV에서 말했듯이 경기장에 수많은 카메라가 설치된 상황에서 선수들의 거의 모든 동작은 어떻게든 포착되게 되어 있다. 에브라의 주장을 완전히 받아들이며 과도하게 해석한 FA의 말대로 수아레스가 7번이나 말했다면 왜 TV 화면으로는 그것을 볼 수가 없나. 에브라는 TV 화면을 보면 다 알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무엇이 영상을 통해 확인되었는가. 오직 두 선수의 적대적 분위기의 대화 장면과 수아레스의 증언에서 언급된 것처럼 에브라가 말이 많다는 손짓 그리고 너는 태클을 당하면 안 되는 선수냐는 의미로 했던 꼬집는 장면 뿐이다. 적대적인 장면이라고 네그로가 언급되었다고 단정할 수 있나? 에브라가 왜 나를 찼냐고 문제를 삼는데 온건한 대화가 가능할까? 에브라의 인터뷰는 네그로라는 말을 완전히 모욕적인 '니거'로 받아들인 상황에서 분노에 차서 나왔던 과장된 발언이라고 봐야 한다. 10회 이상이라는 말은 에브라 자신이 인정하듯 정확히 그만큼 했다는 게 아니라 많은 횟수를 뜻하는 관용 표현에 불과했다. 에브라가 인종차별이라는 심각한 혐의를 제기하면서 10회라는 과장된 횟수를 던져놓고 침묵한 것은 옳은 일일까? 영국 사람들은 프랑스어의 맥락을 모르기 때문에 대부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FA는 횟수에 대한 이 발언이 던진 커다란 파장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밝히지 않고 사태 확산을 방치했다.    

에브라가 네가 흑인이라 찼다는 둥, 네가 흑인이라 말을 안 하겠다는 둥의 말을 통해 수아레스가 총 5회에 걸쳐 네그로라는 말을 썼다고 했던 시간의 일들은 어떻게도 증명될 수 없다. 이 시간의 일과 횟수의 문제는 에브라의 맨유 동료들의 말로도 증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FA와  IRC는 에브라의 말을 믿었다. 그 이유는 수아레스 측의 말이 왔다갔다 한 반면 에브라 측의 말이 일관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리버풀이 변호사를 잘못 고용한 문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FA가 에브라 측과 긴밀히 협력했다는 혐의가 있다는 점이 큰 문제다. 어제 기사를 보면 FA가 에브라는 경기 영상을 보며 무슨 말이 오갔는지 정리할 기회를 준 반면 수아레스는 순전히 기억에 의존해 말해야했던 정황이 나온다. 또 FA는 에브라와 인터뷰한 내용을 정당한 규정과 절차에 따라 수아레스 측에 넘겨야함에도 불구하고 IRC가 독촉한 이후에야 넘겼다. 즉 혐의를 제기한 에브라는 긴 시간을 두고 준비했기에 사건을 정확하고 일관되게 말할 수 있었던 반면,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수아레스는 그냥 기억을 떠올리며 남들이 보기엔 횡설수설하며 신뢰를 잃고 있었다. 

수아레스가 던진 네그로라는 말이 '니거'로 들려 에브라가 충격을 받았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 충격이 에브라의 기억을 왜곡했는지 모른다. 두 선수의 증언이 명백하게 충돌하는 상황에서 한 쪽은 거짓을 말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긴 시간의 조사를 거치고도 그냥 probable이라는 가능성만으로 결론을 내려버린 FA의 입장을 감안할 때 나로서도 무엇이 진실이라 말할 자신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아레스 그리고 그를 지지한 리버풀의 확고한 입장이 그냥 옹졸한 이기주의로 매도되는 상황에서 준비가 잘 된 한쪽의 주장만이 받아들여진 것은 심히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리버풀은 이 일이 축구에서 인종차별을 몰아내는 FA의 입장에 반대하는 것처럼 비춰질까봐 항소를 포기했는데 이제 많은 이들은 수아레스가 그렇게 결백하면 왜 항소를 하지 않냐고 조롱한다. 그 비판자들은 정말 이 사건이 극한의 대립구도로 치닫기를 바라는 것인가? 이미 상처가 날 대로 난 상황에서 사건이 수아레스에게 우호적인 것으로 결론지어지더라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다. 리버풀도 그것을 인정했기에 또 수아레스가 네그로라는 말을 쓴 것이 징계 규정의 제재 대상임을 인정하기에 억울한 심정이 있음에도 사건을 여기에서 종결지은 것이다. 

수아레스는 마침내 사과를 했다. 그러나 에브라에게 사과를 하지는 않았다. 수아레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행보다. 이렇게까지 상황이 진전되었는데 에브라에게 사과의 감정을 갖기는 어렵다. 물론 진실은 모르므로 어디까지나 수아레스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나도 몇 번 얘기했고, 그동안 다른 사람들도 말한 바이지만 수아레스가 비하할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네그로라는 말이 주었을 충격에 대해 일찌감치 사과했다면 일이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수아레스가 그게 잘못인지 정말 몰랐다면 리버풀 측에서 상황정리를 잘 해주어야 했다. 리버풀이 선수를 보호하기 위해 했던 행동은 이해가 가지만 애초에 사과를 했던들 지금까지의 엄청난 사회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리버풀에서 문제의 본질을 알고 간단한 사과의 말을 하도록 결정할 그 누군가가 없었음은 이 사건을 통틀어 가장 아쉬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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