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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 축구

연기된 수아레스 징계 결정. 그만큼 어려운 문제

by wannabe풍류객 2011.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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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FA가 수아레스에 대한 징계 결정을 어젯밤에 발표하지 않았다. 원래 금요일에 발표한다고 결정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비밀리에 지난 수, 목요일 세 명의 독립 패널들이 참여한 청문회 절차가 있었는데 금요일까지 토론한 패널들이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이다. 

현 상황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이 많기에 쉽게 설명을 하자면(인디펜던트 샘 월리스의 논리에 따라 설명하겠다) 현재 에브라는 원고, 수아레스는 피고, FA는 검찰, 세 명의 패널들은 판사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는 재판 절차에 대입했을 때 그렇다는 것이고 현재 진행되는 일이 재판에 준하는 성격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잉글랜드 축구 조직 내의 자체적인 징계 사안이므로 구속과 같은 형사 처벌의 대상이 아니고 사안의 중요함도 그 정도가 아니다. 비교해보면 존 테리의 경우 경찰에서 검찰까지 형사 사건의 절차가 진행되고 있어 수아레스의 경우와 같은 FA의 징계 절차는 중지된 상태다. FA는 형사 절차가 끝난 후 징계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로 했다.

더 구체적 설명을 위해 군대에서의 사례를 들어보기로 한다. 군대에는 나름의 검찰과 법원이 있으니 바로 군검찰과 군사법원이다. 그래서 민간에서 형사 입건된 이후 군에 입대한 사람은 군대 내에서 형사 처벌을 받게 된다. 그런데 군대에는 소위 영창 며칠(최대 15일)이라고 하는 징계 처분이 있는데 이것을 형법상의 구속 및 수감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형식상 헌병대 영창에 갖혀있는 상황이 비슷하기 때문에 분간하기 어렵지만 둘은 삶에 전혀 다른 영향을 끼친다. 소속 부대 지휘관이 결정하는 징계로서 영창은 제대날짜를 그만큼 늦출 뿐이고 호적에 빨간 줄이 그어질 이유가 없지만 형법 상의 혐의로 구속되면 검찰의 조사를 받아야 하고 검찰에 의해 기소될 경우 법원에서 재판을 받아서 징역형에 처할 수도 있다. 

이렇게 사안의 성격을 법적 차원에서 정리해보았다. 수아레스가 엄청난 범죄자인양 비난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에브라와 얽힌 사건의 전말이 아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에브라는 수아레스가 흑인인 자신을 향해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10차례 이상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근 며칠 새 영국 언론에서 거의 사실처럼 드러난 바에 따르면 수아레스는 에브라에게 Porque, Negro? 즉 왜, 흑인?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을 '한 번' 했다고 인정했다. 최근 수아레스가 스페인어로 네그로(영어의 니그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논란의 본질이 아니다. 이미 '네그리토'라는 말을 한 것 같다는 루머는 오래 전에 제기되었다. 핵심은 수아레스가 태어나서 쭉 성장했던 우루과이에서 네그로나 네그리토는 말 그대로 피부색이 상대적으로 검은 친구를 지칭할 때 흔히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수아레스가 아직도 영어가 익숙치 않아 경기 중 '만지지마, 이 남미인'이라는 에브라의 말을 듣고 스페인어로 답한 것이 이상한가?

혹자는 심지어 수아레스가 미리 이런 상황을 따져보고 문화적 차이라는 핑계를 대기 위해 일부러 에브라에게 스페인어로 말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다. 에브라를 믿는 입장이라면 수아레스가 열 번도 넘게 그렇게 말했다니 그런 의혹을 품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이건 너무 지나친 상상이다. 에브라의 말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으나 경기 영상을 다시 보면 과연 수아레스가 집요하게 열 번도 넘게 네그로라고 말할 틈이 있을까 모르겠다. 10회 이상과 1회로 극명하게 다른 네그로라는 말의 횟수도 처벌 수위를 결정할 때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에브라가 수아레스에게 남미인이라고 지칭한 것을 두고 어떤 리버풀 팬들은 에브라가 먼저 도발한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하지만 에브라의 머리를 만진 수아레스가 먼저 빌미를 제공했다고 볼 수도 있다. 말싸움으로만 따져 에브라가 선공을 날렸다고 인정하더라도 수아레스에게는 불리하다. 아프리카 출신 유럽인으로서 에브라가 수아레스를 남미인이라고 지칭한 것이 비하의 의미인지는 조금 애매하지만 유럽의 맥락에서 일부러 흑인을 네그로라고 부를 경우 죄가 될 가능성이 크다. 둘의 대화가 말다툼이었다면 즉 악의적 말교환이었다면 수아레스의 혐의가 인정될 가능성은 높아진다. 그러나 우호적이지는 않았다는 이유로 수아레스가 흑인을 비하하려고 했다는 것도 과장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스페인어가 가장 익숙한 수아레스가 자신의 몸에 밴 그대로, 아무 비하의 의도 없이 자연스럽게 네그로라는 말을 내뱉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새로 나온 기사들에는 아약스에서 감독을 할 때 수아레스를 주장으로 삼았던 마틴 욜의 인터뷰도 실려 있다. 현재 풀럼 감독인 욜은 '네덜란드어를 잘 못하지만' 수아레스를 주장으로 삼았고, 여러 국적의 선수로 구성된 아약스의 주장이었던 수아레스가 인종차별 발언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수아레스가 네덜란드에서 몇 년을 살았는데 네그로와 같은 인종차별적 말을 몰랐냐는 것이 수아레스 비판자들의 주된 주장이지만 수아레스는 네덜란드 말조차 잘 못했다. 모든 선수들이 새로운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극명한 예로 테베스는 잉글랜드에서 웨스트 햄, 맨유, 맨시티를 거치며 수 년을 지냈으나 여전히 스페인어로 인터뷰한다. 단지 몇 년 살았다는 이유로 그 문화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도 편견이다. 물론 새로운 문화를 익히는 것이 살아가는데 더 편하겠지만 통역 등의 도움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스타 선수들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에브라의 언어 생활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될 영상을 소개한다. 영상의 35분 30초부터 에브라가 온갖 욕설을 하며 하셀바잉크와 람파드를 부르고 나서 mother fXXking niggers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2003, 4년에 영어로 랩을 했던 에브라는 심지어 람파드까지 니거라고 지칭했다. 반어법일까 아니면 그냥 욕일까. 백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흑인들이 겪은 수모와 고통을 깎아내릴 뜻은 전혀 없으나 에브라의 이런 언행은 어떻게 평가해야할지 모르겠다.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 수아레스가 인종차별적으로 들리는 말을 했다는 것과 그 인물 자체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흑인 동료들과 클럽과 대표팀에서 오래 생활한 존 테리도 골수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닐 것이다. 조작 의혹이 있다니 테리 발언 증거 동영상을 얼마나 믿어야 할지 모르겠으나 (아직 나는 조작이라는 믿을만한 글을 보진 못했다) 테리의 말에는 형용사와 다른 욕설이 결합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드러난 수아레스의 말은 그냥 스페인어에서 검은 사람을 뜻하는 네그로 한 단어가 전부다. 정말 욕을 하고 싶었다면 그냥 그렇게 하고 말았을까. 비하의 의미일 때는 보통 형용사가 붙는다고 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점령지였던 중남미 지역은 다양한 피부색이 이미 독립 및 건국 당시의 조건이었다. 그곳에서 미국이나 유럽에서처럼 인종차별이 극심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물론 차별 대우는 있겠으나 현재까지 읽은 바에 따르면 그 지역에서는 적어도 피부색을 지칭하는 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사용될 수 있다.

정말 수아레스의 죄가 명백하다면 징계 처분은 진작에 내려졌을 것이다. 이번 사건은 프리미어 리그의 선수 출신지가 영국에서 유럽으로 확장된 데 이어 이제는 중남미를 포함한 전세계로 넓어지며 발생한 문화 충돌 현상의 하나다. 판결을 내릴 세 명의 패널은 모두 잉글랜드 사람으로 보이는데 주말 동안 신중하게 토의해서 올바른 결정을 내리길 바란다. 그리고 전에도 썼지만 수아레스가 비록 의도는 없었더라도 단어 자체가 에브라에게 상처를 줬다면 그 점에 대해서 사과하길 바란다. 그것이 새로운 문화권에 진입한 신입생의 기본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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