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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 축구

가장 위대한 리버풀 선수 50명(The 50 greatest Liverpool players)

by wannabe풍류객 2009.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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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페르난도 토레스 Fernando Torres

2007-present

그가 벌써 50위 안에 들어가서 놀랐나? 알아요 알아, 그 자리에 걸맞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건 예의의 문제다. 토레스는 천재적인 재능이 있고 그의 경력이 끝날 때면 리버풀의 위대한 선수 10위 안에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는 하나의 인센티브다. 아, 죄송. 내가 오해했다. 그가 더 높은 순위에 있을 걸로 생각했다고요? 계속 읽어보면 이유를 알게 될 겁니다.

49 롭 존스 Rob Jones

1991-95 243 appearances

누구?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음, 부상이 없었다면 잉글랜드 역대 최고의 라이트백이었을 선수라면 "개리 누구?" 네블을 말할 지도 모른다. 존스는 모든 것을 가졌다-뛰어난 엔진을 가진 오버래핑 머신, 풀백으로서 좋은 크로스 능력, 그리고 훌륭한 태클. 그는 10년전 고작 대표팀 8경기만에 27살의 나이로 은퇴해야했다. 존스가 부상들로 절뚝거리지만 않았다면 베리(Bury)의 최고 선수는 얼마나 많은 잉글랜드 대표 경기를 뛰었을까? 누가 알겠나? 그러나 그는 아마도 스벤이 인구 절반을 호주와 경기시켰던 2003년 업튼 파크에서의 그 밤에도 나섰을지 모른다. 

브루스 그로벨라 Bruce Grobbelaar
1981-94 628 appearances

나는 그가 자신은 돈을 받고 골을 허용하지는 않는다고 말할 때 그를 믿는 것이 행복하다.  나는 그가 승부조작하는 자들을 내쫓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할 때 수긍하는 것이 행복하다. 그 스스로. 그러나 이유가 어쨌거나 기록된 영상을 보면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잘못된 방향으로 다이빙했고, 공은 우연히 그의 손을 때렸으며, 그로 인해 그는 125,000 파운드를 손해봤다. 나는 그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게 농담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가 이토록 낮은 순위를 기록하는 이유다. 비록 그가 1984년 로마에서 다리를 흔들어댔고, 비록 물구나무, 광대짓 그리고 눈부신 선방들을 했더라도. 아니, 기다려라. 솔직해지자. 난 그냥 그가 싫다. 그는 50위 밖이다. 48위를 다시 정하자. 

그리고 사람들을 제외시키는 걸 말할 때, 맥마나만을 찾는 거라면 그가 있는 세탄타를 보라. 

48 피터 톰슨 Peter Thompson

1963-74 416 appearances

내 아버지는 혀를 가볍게 움직여서 거의 보이지않는 물안개를 일으키며 침을 뱉는 법을 가르쳐줬다. "이렇게 하는 건 나, 너 그리고 피터 톰슨 밖에 없단다,"라고 말씀하셨다. 피터 톰슨은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것들을 할 줄 알았기에 약간의 진실이 있을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윙어인가! 심지어 에버튼의 영웅 딕시 딘마저 그를 보며 침을 흘렸다. 자신이 톰슨과 이안 캘러한 사이에서 뛰었다면 자신의 한 시즌 득점 기록인 60골도 뛰어넘었을 것이라며. 마법과 같은 볼 컨트롤과 재치있는 크로스로 톰슨은 1974년까지 11년 동안 샹클리 팀에 오래 남아있었다. 

47 재키 바머 Jackie Balmer
1935-52, 312 appearances 111 goals

1946-47시즌 전후 최초로 우승한 팀의 지도적인 한 명. 알버트 스터빈스와 함께 수비진을 공포에 떨게 하며 1946년 11월 리그 세 경기 연속 해트트릭을 했다. 로컬 보이이며, 대중 문화의 전설인 스터빈스의 그늘에 가려진 측면이 있다. 


46 사미 히피아 Sami Hyypia

1999-present

이스탄불의 영웅들 중 한 명. 단단하고 믿을 만하다. 억세다. 마치 타고난 센터 하프처럼. 그것이 조건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45 맷 버스비 Matt Busby
1936-39, 125 appearances

눈부신 주장이었던 그는 어린 밥 페이슬리가 1939년 비숍 오클랜드에서 왔을 때 도왔다. 나중에 6번의 리그 우승, 3개의 유러피언 컵, 세 개의 리그 컵을 쟁취할 남자는 버스비가 그의 멘터였다고 말했다. 버스비에게 불행하게도 전쟁으로 그의 선수경력이 끝났고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종종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궁금해진다. 나중에 구글로 찾아봐야겠다. 

44 피터 비어슬리 Peter Beardsley

1987-91 175 appearances

눈부시게 다시 태어나 1980년대 후반을 강타한 달글리쉬팀의 일부. 비어슬리-반스-올드리지로 이어지는 공격축은 보기 좋았다. 그러나 선수가 맨유와 에버튼에서 뛰었다면 40위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건 아주 잘못된 일이다.


43 엘리샤 스콧 Elisha Scott
1912-34 468 appearances

전설적인 골키퍼로 딕시 딘과의 결투가 옛이야기로 전해진다. 이런 고전적인 이야기를 들어봤을지도 모르겠다: 스콧이 라임 스트리트를 걷는데 딕시가 반대편에서 걸어온다. 딘이 알아보고 끄덕이면, 스콧이 번개처럼 길로 내려가 반사작용으로 상상의 공을 향해 다이빙을 한다. 우리 아빠가 얘기해줬다. 나에게 침뱉는 법을 가르쳐주신 분이다.

42 예지 두덱 Jerzy Dudek

2001-07 186 appearances

여기에 단 한순간을 위해 있었다-이스탄불에서 반쯤 그로벨라가 되어 다리를 흐느적거렸던. 그리고 제이미 캐러거가 이 순위에 상당부분 기여했다. 그가 이 폴란드인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했으니까. 


41 밥 페이슬리 Bob Paisley
1939-54 277 appearances

1950년 FA Cup 결승 명단에서 뛰지 못한 것이 페이슬리를 망칠 수도 있었다. 그는 이어진 여름에 클럽을 떠나는 것을 고려했지만 운좋게도 머물기로 결심했다. 2부 리그에서 보낸 1950년대의 암흑 시절의 경험이 20년 후 감독으로서 그의 성공을 더 달콤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40 데이빗 페어클러프 David Fairclough

1974-83 154 appearances

1976년의 공휴일. 안필드에서의 이른 킥오프. 더비 날이었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가운데 유일한 승자는 에인트리에 올 것 같았다. 그러자 호리호리하고 창백한 빨간 머리가 벤치에서 일어나 투입된다. 이후 그는 40야드 밖 케믈린 로드 쪽 터치라인에서 공을 잡고, 안필드 로드 쪽 골을 향해 출발했다. 빨간 머리가 휘날리고, 다리를 격렬히 움직이며 그는 에어리어 근처에 도착했고 슛했다. 에버튼이 마침내 쓰러졌다! 그러나 그 슛으로 페어클러프는 '수퍼서브'라는 원치 않는 닉네임을 얻었다. 이듬해 생테티엔 경기에서 그 타이틀은 영원히 굳어졌다. 빨간 머리가 위대해지는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살아있는 증거. 그리고 팀에서 정규 선수일 필요도 없다. 단지 임팩트가 중요하다.

39 레이 클레멘스 Ray Clemence
1967-81 665 appearances

엄청난 기술을 가진 골키퍼. 그는 운동능력이 좋았고, 위대한 손을 가졌고, 공을 환상적으로 전달했다. 피터 실튼이 경기에서 더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국제 무대에서 이득을 봤지만 샹클리, 페이슬리 모두 키퍼를 바꾸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38 얀 몰비 Jan Molby

1984-96 292 appearances

BMI? 베이컨, 마요네즈 그리고 아이스크림은 얀 몰비와 같은 훈련방식을 계획하는 이들에게 좋은 선택일 것이다. 그렇다, 이 남자는 축구선수들 중에서 무거운 축에 속하지만, 경기장에서 진정으로 무게가 나간 것은 그의 기술들이었다. 우리의 지도자이자 음, 조금 뚱뚱한 신사. 1985년 TV로 방송되지 않은 맨유와의 리그 컵 경기에서 그의 골은 전설이 되었다. 몰비는 그 비디오를 갖고 있지만 그 장면을 만들려고 준비를 하지는 않았다. 그는 덕아웃 근처에서 공을 주워서 폭발적으로 세 명의 상대를 제치고 박스 밖에서 슛을 했다. 개리 베일리는 그가 막아야했던 슛 중에서 가장 강했다고 말했다. 나는 올드 트래포드에 있는 스파이로부터 복사본을 구했다. 그렀다. 맨유는 그 때에도 경기들을 녹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1989년 취한 친구 녀석에게 빌려줬는데 다시는 볼 수 없었다. 리버풀 골 중 성배에 해당할 것인데 멍청하게 내가 잃어버린 것이다. 나는 신화를 깨부수고 몰비가 눈부시게 잔혹하지만 아름다운 태클에 있어 노만 와이트헤드와 결코 견줄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가 결코 세 명의 수비수(반스 때문에 뒤로 물러서는 브라질 선수처럼)를 두고 춤을 추지 않았다고. 슛은 지미 케이스의 특별한 슛의 반 정도 밖에 강하지 않았다고. 그러나 난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상상하는 이상으로 좋은 슛이었다. 사실 샹클리가 말한 것 같은데, 그건 사상 최고의 사건이었다. 

37 필 닐 Phil Neal
1974-85 650 appearances

그는 여기에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가 앞에 있던 지미 케이스 그리고 이후 새미 리에게 얼마나 많은 빚은 지고 있을까? 아주 많이. 





36 토미 로렌스 Tommy Lawrence

1957-71 390 appearances

나는(flying) 돼지. 모든 것을 말해주는 단어다. 전성기에 전통적인 골키핑. 그 별명이 모욕적이라고 생각하나? 당시 에버튼 키퍼였던 고든 웨스트는 리버풀에서 경기를 할 때마다 핸드백을 갖고 나왔다. 


35 알버트 스터빈스 Albert Stubbins
1946-53 178 appearances

나는 스터빈스의 이야기들과 함께 자라났다. 내가 들은 이야기 속에서 그는 골망을 흔들고, 우승컵을 가져오고, 당대 사회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거인이었다. 그는 빅토리아 훈장을 받았고, 물에 빠진 어린이들을 구했다. 알버트는 영웅들 중 가장 위대했다. 비틀즈도 그렇게 생각해서 사상 최고의 앨범 중 하나인 세인트 페퍼의 커버 속에 그를 집어넣었다. 반면 조지 베스트는 The Wedding Present의 레코드 커버에 들어갔을 뿐이다. 하찮게도.

34 크리스 롤러 Chris Lawler

1960-75 549 appearances

'유령'은 흔치 않은 우아함을 갖춘 라이트백으로, 상대 진영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결정적인 골들을 넣었다. 그는 546번의 리그 경기에서 61골을 넣었다. 그리고 이는 최근 수비를 못 하는 윙백들의 기록이 아니다. 롤러는 진정 믿을만한 풀백으로 결코 제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태클할 줄 모르는 변형 미드필더도 아니었다. 샹클리의 팀에 위협과 아름다운 균형을 추가했다.

33 스티브 맥마혼 Steve McMahon
1985-1991 277 appearances

"필요하다면 내 동생이라도 차버릴 것이다... 이것이 프로 축구 선수가 되기 위한 모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결심이 그의 플레이에 반영되었다. 존 올드리지가 1988년 아스날 경기에서 넣은 한 골이 맥마혼을 요약적으로 보여준다. 클리어된 공이 메인 스탠드 터치라인 쪽으로 향했고, 리버풀이 쓰로운인을 얻어 아스날 수비가 정비를 다시 갖출 시간을 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맥마혼은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공을 따라가서 뒷발로 공을 라인에 세워서 인 플레이 상황으로 만들었고, 재빨리 경기장쪽으로 돌아서서 공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는 두 명의 수비수를 지나쳐서 올드리지가 올 곳으로 공을 패스하여 아름다운 골을 만들었다. 왜 맥마혼이 서포트하고 유스 시스템을 거쳤던 에버튼이 그를 아스톤 빌라로 가게 했는지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자기의 동생을 차는 것처럼 그가 에버토니안이었다면 그를 찼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나?

32 스티브 니콜 Steve Nicol

1981-95 468 appearances

케니 달글리쉬를 비판할 부분은 별로 없지만 니콜이 성격이 나쁜 사람이었다면 그는 케니의 부두인형을 앞에 두고 핀 공장에서 찔러댈 것이다. 만약 니콜이 그의 포지션에서만 뛰었다면 역사상 최고의 풀백으로 칭송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달글리쉬는 이 선수의 기념비적 능력을 알아채고 그를 피치 곳곳으로 옮기며 구멍이 날 때마다 채웠다. 이게 먹혀들었는데, 니콜은 어디에서나 뛸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9년 그는 올해의 축구 선수가 되었다. 그 시즌 그는 6개의 다른 포지션에서 뛰었다. 그는 그렇게 좋은 선수였다. 

31 새미 리 Sammy Lee
1976-1986 295 appearances

리를 저평가하기는 아주 쉬웠을 것이다. 키 작고, 어린 아이 얼굴을 한 통통한 그가 어떻게 유럽의 최고 팀 중 하나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실제 벌어졌던 것처럼 그는 빨간 기계(리버풀)의 가장 핵심적인 톱니바퀴가 되었다. 항상 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항상 뛰어다니며 상대방을 압박했다. 리는 미드필드에서 지루하고 힘든 일을 했고 더 침략적인 재능이 있는 선수들이 활개치도록 도왔다. 새미의 위대함에 대한 증언이 필요하다면 폴 브라이트너에게 물어보아라. 이 독일인은 1981년 유러피언 컵 준결승 1차전 안필드 경기에서 0-0으로 비긴 이후 리버풀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바바리아로 돌아가 미드필드를 점령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리가 브라이트너를 전담 수비하자 그의 경기는 절망에 빠졌다. 그리고 바이에른은 결코 잘 할 수 없었다. 

30 게리 번 Gerry Byrne

1955-1969 333 appearances

FA컵 결승 9분만에 번의 쇄골이 부러졌다. 병원에 가야하나? 주사? 눈물? 절대 아니다. "경기장을 떠난다는 생각은 조금도 나지 않았어요,"라고 그가 말했다. 음, 그러지 않았을 거라고? 당시엔 교체가 없었다. 그래서 90분 그리고 연장까지 번은 계속 뛰었다. 그는 심지어 크로스를 하여 로저 헌트가 넣은 경기 첫골을 만들었다. 1965년 리버풀이 최초로 FA컵을 우승한 순간이었다. 그때까지 에버토니안들은 만약 레즈가 컵을 우승하면 라이버 버드들이 날아가버릴 것이라고 코파이트들을 놀려먹었다. 요구 이상의 것을 보여준 번의 영웅적 행동이 거짓말을 까발리는데 일조했다. 

29 로니 웰란 Ronnie Whelan
1979-1994 493 appearances

1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웰란은 최전방 포워드에서 수비형 미드필드까지 위치를 옮기며 그에게 요구된 모든 위치에서 일정 수준으로 뛰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골들로, 두 골로 1982년 리그 컵에서 토트넘을 이길 수 있었고, 일 년 후 같은 대회에서 휘어지는 슛으로 웸블리에서 맨유를 꺾었다. 그러나 웰란에겐 훨씬 많은 것이 있었다. 그는 내가 본 빨간 셔츠를 입은 어떤 선수보다 경기의 템포를 조절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28 존 토샥 John Toshack

1970-78 247 appearance

나는 토샥이다. 키 큰 남자보다 키가 큰. 1973년이다. 나는 UEFA 컵 결승 선발명단에서 빠졌다.

"수요일에 샹클리가 명단을 발표했지, 
그러나 한 선수의 꿈이 산산조각났네. 
그의 시즌은 끝났고, 날아가 버렸지,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할 말이 있어."

신들이 화났다. 그들은 비를 보냈다, 아주 격하게, 그리고 경기에 벌을 내렸다. 
"그런데 우연히 정말로 쏟아지기 시작했지, 
22명의 선수들은 네 발로 기었지. 
주심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지,
리버풀이 독일인들이 속임수를 쓴다고 말할까?"

하루가 지나고, 대홍수로부터 내가 떠올랐다. 묀헨글라트바흐 위로.
"웨일즈인이 공중에서 그들을 죽였지, 
토샥과 키건, 훌륭한 한 쌍!" 

유럽이 나를 두려워한다. 이크, 토샥이다. 1976년이다. 누 캄프는 내 꺼다.
"한 골의 밤(A Goalden night) 그리고 얼마나 스릴있던가, 
리버풀 1 : 바르셀로나 0."

나는 널 조롱한다, 크라이프. 나는 널 조롱한다, 셰익스피어. 나는 널 조롱한다, 테니슨. 나는 시인. 나는 전사. 여자들이 내 발 아래 쓰러진다. 나는 토샥.

27 존 올드리지 John Aldridge
1987-89 104 appearances 63 goals

리버풀이 94년 월드컵에 보낸 문화 사절. 모든 골은 잊어라, 그가 빨간 셔츠를 입었을 때처럼 경기한 코파이트라는 것을 잊어라. 이것은 그의 순간이었다. 아일랜드 팀의 교체선수인 그의 투입은 너무 참견하기 좋아하는 녀석 때문에 늦어지고 있었는데, 알도는 졸고 있는 텔레비전 국장에 의해 전세계에 중계되었던대로 자신의 마음의 일부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욕이 섞인 가장 진한 리버풀 말투는 사상 최고의 웃기는 장면 중 하나였다. 전세계 모든 어린이들이 트라우마에 빠졌다. 나는 그가 당시 리버풀 선수가 아니었음을 알지만, 알도는 언제나 우리에게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했으면 한다. 사실이다. 

26 디트마르 하만 Dietmar Hamann

1999-2006 283 appearances

만약 카카가 100m 파운드의 가치가 있다면 그를 침묵시킨 남자의 전성기 시절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 하만이 벤치에 앉아있는 가운데 브라질 선수는 2005년 챔피언스 리그 결승 전반전 아타투르크에서 뛰어다녔다. 전반전 3-0으로 승부는 결정되었다. 이후 디디가 왔고 이스탄불의 기적이 연출되었다. 그 밤 수많은 영웅이 있었지만 모든 것은 하만과 함께 시작되었다. 

25 스티브 하이웨이 Steve Heighway

1970-81 475 appearances

내 동생의 이름은 하이웨이를 따른 것이다. 그는 1971년 FA컵 결승에서 골을 넣은 첫번째 리버풀 선수의 이름을 따르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에믈린 휴즈가 공을 잡을 때마다 공포에 떨며 발로 찼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하이웨이의 이름을 갖는 것에 당황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한다. 또 하나의 위대한 윙어로 토샥-키건이라는 짐승들을 먹여살렸다.

24 마크 로렌슨 Mark Lawrenson

1981-88 356 appearances

로렌슨에 대한 기억 중 가장 생생한 것은 마지막 순간에 가하는 그의 태클이다. 에릭 게이츠가 슛을 하기 직전의 상황을 기억하나? 로로가 뒤에서 망원경같은 다리를 뻗어 공을 뺏었다. 이런 일을 수도 없이 했다. 위대한 이들 중 하나... 이것... 경기장에서의 파트너이자 방송국의 동료인 알란 한슨이 이 모든 것을 더 잘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모든 면이 그렇다. 중앙 수비수? 한슨. 해설가? 한슨. 모든 것이. 만약 콧수염을 기르기만 한다면 한슨의 것이 더 깔끔하고, 풍성하고 더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인생은 이토록 잔혹하기도 하다. 망할 한슨만 없었다면 로렌슨은 여기에서 탑 10 안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23 조이 존스 Joey Jones
1975-1978 100 appearances

주먹. 팔뚝. 문신. 태클들. 배너. 이것들이 위대함을 더해준다. 약간 광기가 있었던 태클을 했던 한계가 있는 레프트백 존스는 경기 전에 터널을 뛰어나와 콥으로 달려가 주먹을 흔들어대며 자신의 결심을 보여주곤 했다. 콥 전체가 경배하며 응답했다. 그리고 배너가 있다. '조이가 개구리 다리를 먹었다. 스위스를 구르게 만들고, 이제 글라트바흐까지.'

22 레이 케네디 Ray Kennedy

1974-82 393 appearances

케네디는 힘든 시기에 빠졌다. 파킨스 병에 걸리고, 금전적 어려움도 심했다. 그는 그의 메달들을 팔아야했고, 그것들은 현재 PFA 소유이다. 그의 몰락을 본 후 눈을 감고 그의 전성기를 기억하는 것은 얼마나 화나는 일인가. 왼쪽 미드필드에서의 거칠지만 우아한 존재로, 늦게 올라가 아무도 모르게 최고 수준의 골들을 넣곤 했다. 리버풀과 아스날 팬들은-케네디는 안필드에서 후방에서 뛰기 전에 거너스에서 센터포워드로 뛰며 두 번 우승했다-힘을 합쳐 그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희망의 레이' 청원을 했다.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케네디는 그의 마법같은 왼발로 그가 뛴 모든 경기의 질을 향상시켰기 때문이다. 

21 테리 맥더못 Terry McDermott
1974-82 329 appearances

1970년대 심판들 중 한 명은 리버풀 경기가 재미있기 때문에 맡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리버풀 진영 깊숙한 곳에서 공을 따내면 맥더못이 상상의 나팔을 연주해서 기병들을 진격시켰고, "CHE-ARRRGE!"라는 울부짖음으로 마무리하면 레즈가 폭풍처럼 진격했다고 한다. 그리고 1978-79년 팀은 그렇게 경기했다. 기회가 있을 때 폭풍처럼 앞으로 나아갔고 상대방을 산산조각냈다. 케이스, 맥더못, 수네스 그리고 케네디는 리그 사상 가장 위대한 미드필드진이었고 범죄적으로 저평가되었다. 맥더못은 다른 세 명보다 훨씬 저평가되었다. (늦게 출발했지만 따라잡는) late run의 최강자인 그는 현대축구에서라도 프랭크 램파드 같은 것들보다 나은 선수로 살아남았을 것이다. 

20 이안 캘러한 Ian Callaghan

1960-1978 857 appearances

캘리는 팀의 조지 해리슨이었다. 종종, 특히 70년대 후반 저평가되고 조롱받았던.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빌리 리들을 대체하며 2부 리그에서 시작했고, 유러피언 컵 결승으로 마무리했다. 어린 시절 날아다니는 윙어로부터 더 전통적인 미드필드로 뛰던 인디언 써머 시기까지 그는 모든 것을 잘했고, 팀이 움직이게 만들었다. 

19 마이클 오웬 Michael Owen
1996-2004 297 appearances 158 goals

모든 위대한 스트라이커들은 이기적일 필요가 있지만 더 많은 것까지 수용할 필요도 있다. 오웬을 완전하게 이용하는 유일한 방법은 나머지 팀동료들이 그를 위해 경기하는 것이다. 그가 마지막 수비수의 어깨에 앉아 공중으로 날아오는 롱볼을 받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미드필더들은 너무 깊숙히 후퇴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미드필드에 스티븐 제라드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건 낭비다. 그는 공격진에서 누구도 파트너로 함께 할 수 없었고, 경기장에서 유일하게 효율적으로 작용했던 것은 에밀 헤스키와의 파트너십이었다. 헤스키는 자질구레한 일도 했고, 심지어 보조적인 미드필드 선수로 뛰기도 했다. 이런 부정적인 점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소년은 득점할 줄 안다. 그래서 리버풀은 2001년 아스날과의 FA컵 결승처럼 지는 게 당연한 경기들을 이겼다. 그래서 비록 이기적인 어린 아이를 이렇게 높은 순위로 두는 것이 마음 아프지만 여기 그가 있다.

18 지미 케이스 Jimmy Case

1973-81 269 appearances

훌륭한 남자, 훌륭한 슛... 케이스는 매니저의 꿈이었다. 그는 경기할 줄 알았고, 그는 수비할 줄 알았고, 그는 득점했고, 아무도 자유를 얻을 수 없었다. 1977년 FA컵 결승에서 그의 골은 웸블리 사상 최고의 골 중의 하나였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경기 후 케빈 키건을 때려 그의 눈에 멍을 만들면서 한 점을 더했다고 한다. 케이스는 항상 그 사건을 부정한다. 부끄러운 일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는 가볍게 10위 안에 들어갔을 것이다. 

17 에믈린 휴즈 Emlyn Hughes
1967-1979 665 appearances

자, 휴즈의 가장 좋았던 순간은 무엇이었나. 구디슨에서 두 골을 넣었던 "잘했어 에믈린" 더비? 잉글랜드 주장이 된 것? 유러피언 컵 들어올린 것? 1980년 OBE가 된 것? Question of Sport를 진행했던 시간들? 아니다. 1977년 5월 픽튼 도서관 계단에서 큰 컵을 리버풀로 가져오면서 그는 모인 사람들에게 영광스러운 말을 따라부르도록 했다: "리버풀은 마법, 에버튼은 비극(Liverpool are magic, Everton are tragic)*"  알겠지만 그가 옳았다. 휴즈는 마르지 않고, 멈추지 않는 스타일로 경기하는 비범한 선수였다. 그는 태클도 잘 하고 패스도 잘 했다. 심지어 미친 말이라는 위대한 별명까지 가지고 있다. 그가 마가렛 대처에게 키스하지만 않았어도 그의 순위는 더 높았을 것이다. 1980년대 리버풀에서 산 우리들은 긴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테리 맥더못이 발코니에서 소변을 보고, 우연히 성 요한 앰뷸런스의 간호사들에게 뿌려댔던 바로 그 밤이다.

16 필 톰슨 Phil Thompson

1971-1985 477 appearances

공을 스탠드로 차버리는 것 이상의 일을 할 수 있었던 신세대 센터백들 중 한 명. 샹클리는 이 비쩍마른 아이가 경기할 줄 안다는 것을 알아보고 그의 유럽 공략-이후 페이슬리가 완성했던-에서 핵심 요소로 삼았다. 톰슨의 보상은 파리에서 리버풀을 세번째로 유러피언 컵으로 이끌고, 그 트로피를 그의 동네 펍 커크비의 팔콘으로 가지고 온 것이다. 그는 바에서 밤새 앉아 있다가 취해서는 컵에 대해서 잊어버렸다. 하여튼 커크비는 에버튼이 새로운 경기장을 지으려는 장소이다. 이웃이 간다...

15 알란 케네디 Alan Kennedy
1978-85 359 appearances

1980년대 초반 모든 것을 정복했던 팀에서 최악의 선수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닉네임, 바니 러블은 그가 가끔씩 취약한 모습을 보인 만화속의 코미디같은 장면 때문에 붙여졌다. 그리고 그는 아주 보기 흉한 퍼머 머리와 콧수염을 갖고 있다. 경기장에서 클래스와 정교함이 배어나오던 레이 케네디가 뛰어다녀 사람들은 그를 알란과 헛갈려했다. 그러나 바니가 1981년 레알 마드리드와의 유러피언 컵 결승의 유일한 골을 넣었고, 3년 후 로마에서의 결승에서 승리를 결정지은 페널티킥을 넣었다. 이런 경력을 가진 선수라면 어떤 순위를 매길지 별 고민이 필요없다. 위대한 선수들 중 하나.

14 로비 파울러 Robbie Fowler

1992-2001, 2006-07 369 appearances 183 goals

로비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모든 이유를 가진 리스트가 있을지도 모른다. 골 앞에서의 마법의 터치, 그가 마약을 한다고 조롱하는 에버토니안에 대한 응답으로 하얀 선에서 킁킁대는 셀러브레이션을 한 것, 해고당한 부두 노동자를 위한 티셔츠 서포팅, 누가 진정한 유럽 최고인지를 알리기 위해 맨유 서포터들에게 다섯 손가락을 펼치며 인사한 것 - 이것들은 하이라이트들일 뿐이다. 그러나 이에 더해서 그가 부동산 거래로 돈을 벌어들이는 동안 'Asbo'd up South Ender'라고 했던 처신에서 특히 스카우즈 적인 천재성을 이해하게 될 지도 모른다. 진정한 노동 계급의 영웅.

13 론 예이츠 Ron Yeats
1961-71 454 appearances

프로 축구 선수가 되기 전에 빅 론은 애버딘의 도축장에서 일했다. 그가 던디와 계약할 때 지역 신문이 사진사를 보내 새로운 선수의 사진을 찍도록 했다. 예이츠는 작업복을 입고, 피투성이가 되어 고기 자르는 칼을 손에 꼭 쥔 채로 사진을 찍었다. 스코틀랜드의 모든 스트라이커들이 그 사진을 보며 사타구니의 통증을 느꼈다. 그리고 그거 아시나? 그는 핏빛의 빨간 색 옷이 아주 잘 어울린다. 샹클리가 그걸 알아채고 산같은 이 남자를 안필드로 데려와 주장으로 임명했다. 리버풀이 크게 성공을 거두는 시절을 만들어 나가는데 기여를 한 리더였다.

12 이안 세인트 존 Ian St John

1961-71 425 appearances 118 goals

예이츠와 세인트 존은 같은 패키지의 일부이다. 1961년 여름 샹클리가 수입한 스코틀랜드의 재능 두 명이다. 세인트와 그리브스의 온화한 성찬은 잊어라. 이는 깐깐한 스코틀랜드산 공격이었고 그를 상대한 어떤 수비수도 쉽게 그를 없앨 수 없었다. 이 둘은 샹클리의 1차 위대한 팀의 척추였다. 그들은 안필드 주변을 거닐며 유러피언 컵 5개를 따내면서 클럽이 얼마나 거대해졌는지를 보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만드는데 일조했지."

11 이안 러쉬 Ian Rush
1980-87, 1988-96 660 appearances 346 goals

러쉬가 다른 대부분의 스트라이커와 구별되는 점은 끊임없이 먹이를 찾아 배회한다는 것이다. 그는 항상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겼고, 수비수들이 안정을 갖추도록 놔두지 않았다. 그의 발과 머리는 빨랐고, 심지어 그보다 더 날카로운 축구 두뇌를 가진 달글리쉬의 공을 받았다. 가장 칭송받는 그의 경기력은 1982년 구디슨 파크에서 에버튼을 5-0으로 이긴 경기에서 네 골을 넣은 것이었다. 그러나 게임은 블랙번 로버스에서 에버튼으로 임대온 글렌 킬리가 20분만에 퇴장당하면서 재미가 없어졌다. 그렇다, 킬리가 경기장에 계속 있었다면 러쉬는 아마 최소한 6골은 넣었을 것이다.

10 로저 헌트 Roger Hunt

1958-69, 492 appearances, 286 goals

세인트 존을 돋보이게 하는 존재이자 샹클리의 1960년대 혁명의 최신판. 그의 일은 박스 안으로 들어가 톰슨과 캘러한이 주는 공을 받아먹는 것이고, 그는 침착하게 그 일을 했다. 클래스 있는 경기력.  잉글랜드를 위해서도 몇 경기 뛰었다. 비록 우리는 크게 신경쓰지 않지만 알프 람지에게 작위를 수여할 것이었다면 왜 로저 경은 안 되나? 그러면 그는 언제나 우리의 로저 경이 될 것이다. 어쨌거나 다른 데보다는 콥의 명예 시스템에서 받는 게 더 좋긴 하다.

9 제이미 캐러거 Jamie Carragher
1996-present

부틀 출신의 소년은 클럽의 진정한 전통의 하나로 성숙했다. 위대한 선수들의 무리에서 자신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존재. 선수로서 한계가 있을지도 모르나 능력을 초월하는 감정적 불꽃으로 그는 리버풀 방식의 현대판이 되었다. 더 좋은 칭찬이 있을 수 없다.


8 빌리 리들 Billy Liddell

1939-61, 534 appearances, 228 goals

1950년대의 어두운 시절 그들은 클럽을 '리들풀'이라고 불렀다. 황량한 시기에는 리더가 있어야 한다. 테라스와 펍에서 믿음이 살아있도록 하고, 희망을 주는 누군가가. 이것은 트로피들을 따내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고, 이 위대한 레프트 윙어는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7 알란 한슨 Alan Hansen
1977-91, 620 appearances

부드럽고, 부드러운 조종자. 처음 왔을 때 그는 안필드에 살면서 스탠리 파크의 주차장에서 벌어진 즉흥적인 경기들에 참여하곤 했다. 수많은 내 친구들이 경기를 했고, 그들은 어린 한슨에게 많은 기대를 갖지 않았다. 그들이 어떤 판단력을 가졌는지 보여준다. 모두가 이 센터하프가 공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패스도 잘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강하지 않지만 아주 정확하게 했던 태클의 뛰어남과 그의 위치 감각에 대해서는 잊어버렸다. 그에겐 모든 것이 쉬워 보였다. 그러나 속지말아라. 그는 열심히 노력하고, 교훈들을 배웠으며, 선수로서 발전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은 남자였다.

6 케빈 키건 Kevin Keegan

1971-1977, 323 appearances, 100 goals

1970년대는 얼마나 흥미로운 시절이었던가. 콥은 흥분으로 들썩였고, 키건은 테라스로부터 흘러넘치는 쉴틈 없는 에너지의 상징이었다. 그는 뒤쫓았고, 그는 약탈했고, 그는 모든 것을 던졌다. 우리는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는 떠나버렸고 우리 모두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도전이라고 말했다. 그냥 우리에게 진실을 말해, 돈이라고라며 우리는 울었다. 그의 작별 선물이 케니 달글리쉬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우리는 그를 훨씬 전에 문밖으로 떠밀었을 것이다.

5 토미 스미스 Tommy Smith
1962-1978, 638 appearances

안필드의 강철. 캐러거처럼 스카우즈의 정수가 증류되어 리버풀 셔츠에 스며들었다. 좋아하지 않을 점이 있나? 1977년 로마에서의 그 황홀한 밤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상대로 결정적인 두번째 골을 넣었다. 여전히 순위가 너무 높다고 말하고 싶나? 음, 사실 그는 나와 같은 중학교를 나왔다. 리스트를 만들 때는 같은 학교 출신을 자신이 원하는만큼 높은 순위에 둬도 된다. 오직 필요한 것은 유러피언 컵 우승을 결정지은 골을 넣은 선배를 찾는 것뿐.

4 그램 수네스 Graeme Souness

1978-84, 359 appearances

샴페인 찰리. 그를 저질의 제임스 본드처럼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니엘 크레이그 패션의 우아한 야성, 그의 몸 전체로 사디즘이 흐르는 가운데. 아, 그를 보는 것은 즐거웠다. 그는 글렌 호들만큼이나 쉽게 패스했다. 그러나 호들과 달리 수네스는 돌보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를 화나게 하면 험한 꼴을 당할 것이다. 때로는 심지어 화나게 할 필요도 없다. 여전히 그의 경기의 가장 위대한 부분이 드러나지 않았다. 대부분 그의 패스는 10야드 이하이다. 공을 패스한 이후 그는 그 공을 다시 받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공간에 침투한다. 완벽한 패키지. 미드필드 선수 중 가장 뛰어났다.

하지만 너무 너무 실력없는 감독이었다. 알렉스 퍼거슨보다 리버풀이 추락하는데 더 큰 기여를 했다.

3 존 반스 John Barnes
1987-97, 407 appearances

날뛰는 반스는 축구경기에서 가장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것중 하나였다. 매혹적인 볼 컨트롤이 윙어에게는 드문 직접적임과 결합되었다. 누구도 믿기 힘들 정도로 균형을 잘 잡았고, 몸집이 큰 수비수들도 기념비적인 장딴지에 나가떨어졌다. 반스가 이끈 1987, 1988년의 축구는 어떤 리버풀 팀이 도달한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이었다.

2 스티븐 제라드 Steven Gerrard

1997-present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알 것이다. 내가 그를 리스트에서 순위를 내리려고 할 때마다 마음이 약해졌다. 그의 경력 속의 온갖 굴곡과 반전에도 불구하고 그가 있을 때 팀은 더 잘했다. 그가 콥의 완전한 사랑을 얻은 적은 없었지만, 그의 경력의 후반전엔 그것마저 자랄 지 모른다.

1 케니 달글리쉬 Kenny Dalglish
1977-1990, 515 appearances, 172 goals

두 개의 리스트가 있어야 한다. 달글리쉬를 위한 하나, 나머지들을 위한 하나. 그는 그토록 흔치 않은 존재로, 리버풀 선수들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면 그를 더 넓은 범주의 순위에 자리매김해야할까? 축구 역사 속에서? 물론 마라도나가 있다. 하나의 범주를 형성하는 또 한 명. 마라도나에 이어 펠레, 크라이프, 베켄바우어라는 일련의 그룹이 있다. 지구적 관점에서 보자면 달글리쉬는 더 낮은 순위다. 크라이프의 몰락과 마라도나의 등장 사이의 짧은 기간 이 스코틀랜드인은 세계 최고의 선수였다. 그 자신만의 능력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는 모든 팀 동료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기교까지 갖추고 있다. 덜 중요하고, 자기 중심적이고, 소위 위대한 선수로 불렸던 다른 자들과 달리 그는 결코 이기적이지 않았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도 그는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힐스보로 참사 이후 개인적인 정신적 충격에도 불구하고 그가 모든 유가족을 방문하고 참여할 수 있는 모든 장례식에 갔던 행동들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와 샹클리는 리버풀 역사의 거대한 탑과 같은 존재들이다.


Tony Evans는 Far Foreign Land: Pride and Passion the Liverpool way의 작가이다.

http://www.timesonline.co.uk/tol/sport/football/premier_league/liverpool/article5703041.e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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