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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orary

[연극] 시집가는 날

by wannabe풍류객 2010.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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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갑자기 연극 '시집가는 날'을 보았다. 달오름극장이 어디인지도 몰랐고, 동대입구역이 대학로와 얼마나 떨어져있는지도 몰랐고, 달오름극장이 국립극장이라는 것도 몰랐다. 7시 30분 시작이라 저녁 시간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아내와 둘이서 부랴부랴 극장을 찾아갔다. 

연극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고, 단지 정보석이 나온다는 것만 믿고 보기로 했던 터였다. 시집가는 날이라기에 어떤 여성이 정보석과 결혼하는 훈훈한 이야기겠거니, 결혼한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우리가 결혼한 날을 되돌아보기에 좋겠구나라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종종 그렇지만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연극이 시작되자 한 쌍의 남녀가 현대식 한복(?)을 입고 현대 무용을 한다. 마찬가지로 현대화된, 아니 소재만 한복인 듯 하고 서구식의 의상을 입은 여러 여성들이 걸쭉한 입담을 과시하며 등장했다. 설정 자체가 그렇기 때문인데 이들은 저잣거리의 여인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맹진사댁 갑분이와 갈등 관계다. 여기서 잠깐. 맹진사댁? 맹진사댁? 아주 친숙한 명칭이다. 공연을 본 후 검색해서 알았지만 이 연극은 "맹진사댁 경사"라는 유명한 연극 그리고 영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것은 신분 구조에 대한 비판이다. 돈으로 양반이 된 양반 같지 않은 양반이 등장하고, 신분을 뛰어넘는 혼례가 이루어진다. 사실 이런 작품이 등장하는 게 가능하려면 조선 말이나 되어야 했을 것이다(알아본 바로는 1942년 오영진씨가 쓴 시나리오가 원작이다). 작품 속의 인물들의 다수는 신분제의 부당함을 인식하고 있고, 최고의 신분인 김판서가 갑분의 몸종 입분을 화통하게 며느리로 받아들일 정도로 신분 제도의 정당성은 위아래 모두로부터 흔들린다. 

다시 첫부분으로 돌아가면 맹진사의 외동딸 김갑분은 철없이 종인 입분의 옷을 입고 저잣거리의 여인들과 친구 사이로 돌아가자고 조른다. 극의 전개를 볼 때 이 두 명이 옷을 바꿔입은 것은 매우 상징적이었다. 입분은 김판서의 아들 미언과 결혼하여 양반이 되었고, 갑분은 평소 사모하던 머슴 삼돌이와 결혼하며 하층 신분으로 되돌아간다. 

맹진사는 신분을 돈으로 샀다고 하는데 그 아버지 대에서 산 것일 가능성이 적지 않다. 삼돌이와 갑분의 회상 장면의 대사를 보면 갑분은 어릴 적부터 양반이었음이 분명하고, 맹진사 아버지와 도라지골 김판서의 면식에 대한 언급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갑분이 저잣거리의 여인들과 어릴 적부터 친분 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고, 갑분이 어릴 때부터 양반이었다면 낮은 신분의 친구들이 새삼스럽게 갑분의 결혼을 시샘하는 것도 이치에 닿지 않는다. 여하튼 갑분은 첫 등장에서부터 하인의 복장을 입으며 자신의 운명을 예고했고, 그 자신이 양반의 자질이 없음을 여러 차례에 걸쳐 드러냈고, 또 삼돌과의 결혼을 전혀 거리껴하지 않는다.

한편 입분은 처음 등장과 이어지는 미언과의 첫 만남 장면에서 계속해서 양반인 갑분보다 더 사리분별이 확실함을 증명했다. 오히려 김판서의 아들 미언은 말의 것처럼 커다란 성기(연극에서는 상당히 과장되게 표현했다. 이것이 어찌 가족이 함께 볼 연극이란 말인가!!)를 태연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내보이며 목욕을 하는 천박함을 드러냈다. 그냥 젊은 혈기에 그랬다고는 하더라도 미언은 원작보다 훨씬 더 희화화 된 것 같다. 이렇게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이 자꾸 등장하며 신분의 장벽은 쉽사리 통과된다. 다른 신분 간의 결혼은 정당화된다. 

말XX는 연극에서 매우 중요한 장치이자 원작을 재밌게 비트는 대목이다. 원작은 김미언이 단지 절름발이라는 소문이 난리법석을 만들지만 이 연극은 두 다리가 아니라 소위 가운뎃다리가 없는 고자라는 설정을 내세운다. 절름발이보다 더한 고자라는 세팅으로 연극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원래는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 때문에 사위감, 즉 사람됨을 보지도 않고 혼례를 추진한 맹진사의 추잡함과 어리석음을 비판하는 내용이지만 이 연극은 그것에 더해 사랑이라는 가치를 내세운다. 사랑은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것 모두를 말한다. 생판 모르는 남자에게 '팔려가는' 마당에 남편이 고자라면 여자가 남자를 사랑할 수 없을 터이다. 갑분의 어머니를 비롯한 집안의 여성 어른들은 모두 그런 점을 개탄한다. 결국 일이 잘 풀려 입분이 미언과 결혼하여 첫날밤을 치르는데 연극은 그 지점에서 사실상 막을 내린다. 해피 엔딩이지만 연극이 서구적 사랑이라는 감정을 내세웠다면 수동적으로 미언과 결혼하게 된 입분이 그를 사랑하는 장면을 보여주었으면 더 완결성이 있었을 것이다. 

꽤나 유쾌했고 정보석과 김정균이라는 TV 화면을 통해 친숙한 배우들의 연기를 눈으로 직접 봐서 더 좋았다(연극을 보며 맹진사가 김정균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작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몰랐는데 작년에도 같은 장소에서 공연된 바 있다. 이번 공연은 어제부터 내일까지다. 나의 평가는 아니지만 극이 끝난 후 내 옆을 스쳐가던 여성이 "내 생애 제일 재미있었다"고 하니 관심있는 사람은 가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래 링크에서 작년 공연 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 몇 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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