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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orary

써니 (2011)

by wannabe풍류객 2011.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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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얼마만에 가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CGV 영화예매권을 기한 내에 쓰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 CGV는 쿵푸 팬더, 캐리비안의 해적, 써니 위주로 상영을 하는 중인데 아내의 뜻을 고려해 써니를 봤다. 평이 좋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영화의 시작은 꽤 진부하게 전형적인 비정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그리며 시작된다. 임나미라는 이름보다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로서 존재하는 한 여성은 자신의 남편, 딸과 의사소통이 단절됨을 느낀다. 그리고 창밖을 보며 자신의 여고 시절을 회상한다. 

나미는 언제나 자신에게 따뜻한 존재인 자신의 어머니의 병문안을 갔다가 병원에서 익숙한 이름을 발견한다. 하춘화(감독이 왜 여러 이름 중 유명한 가수의 이름을 택했는지 모를 일이다). 나미는 춘화가 내가 아는 춘화인지 확인하려 그 병실을 찾는다. 병원비를 많이 내야 할 것 같은 고급 1인 병실. 그곳에는 거짓말처럼 실제로 그녀의 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재회는 시한부라는 친구의 운명 때문에 짧을 수밖에 없었다. 친구는 작별 선물로 써니의 재결성을 요구했다. 

나미는 고교 시절 쿨했던 담임 선생님이 이제는 교장(?)으로 재직하는 모교를 찾는 것을 시작으로 써니의 나머지 다섯 멤버를 하나씩 찾아나간다. 현재 짝이었던 장미는 보험 설계사로, 욕쟁이 진희는 부자 남편의 아내로, 힘좋던 문학 소녀 금옥은 시어머니와 갈등하며 경제적으로 넉넉치 않은 가정 주부로, 미스코리아가 되겠다던 복희는 최하급 주점 직원으로 살고 있었다. 수지는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친구들을 찾는 과정은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며 매끄럽게 화면에 전개되었다.

유호정도 괜찮았지만 진희경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돈이 있어야 가능했던 해피 엔딩

시한부의 춘화는 써니의 멤버를 다 만나지는 못하고 죽었지만 결론적으로 영화는 해피 엔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해피 엔딩은 순전히 춘화가 남긴 유산 덕분에 가능했다. 춘화는 어떤 일을 했는지 몰라도 회사를 운영하며 상당한 부를 축적해두었다. 고등학교 시절 회상 신에서 휴대폰 등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미래의 히트 상품들의 실현 가능성을 예측하던 소녀였으므로 상업적 성공을 거둘 잠재력은 갖고 있었다. 

춘화의 막대한 유산은 경제적 곤란에 처한 친구들의 어려움을 일거에 해소했다. 장미는 보험왕, 금옥은 출판사 사장, 복희는 딸과 살 수 있는 아파트와 직업을 얻을 예정이었다. 비록 춘화의 부탁이긴 하지만 돌연 밝아진 미래 덕분에 그녀들은 우울해야 마땅할 빈소에서 춤을 춘다. 

써니의 멤버들은 고교 졸업 후 아니 아마도 춘화의 퇴학 이후 처음 다시 만나는 것인지 모른다. 7명 중 누구도 다른 멤버와 연락하며 살지 못했다. 급변하는 한국 사회에서, 특히 여성으로 살아가며 친구보다는 가족의 삶만을 신경쓰며 살았던 것은 보편적인 모습이다. 그녀들은 가끔씩 과거를 회상하며 친구들을 생각했겠지만 자신의 삶의 리듬을 깨면서 굳이 그네들을 찾을 여유가 없었다. 오직 시한부 인생인 갑부 하춘화의 요청과 부유하고 남편의 출장으로 시간까지 생긴 나미의 의지가 결합하여 써니 멤버들이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써니 재결성의 위기는 복희를 찾았을 때 찾아왔다. 저조한 실적의 보험설계사인 장미는 비참한 복희를 보며 차라리 외면하자고 주장했던 반면 100만원을 쉽게 내던질 수 있던 나미는 무언가 조치를 취하겠다며 복희에게 다가갔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어려움에 빠진 사람에게 용기를 주지만, 일정한 물질적 지원까지 해줄 수 없다면 섣불리 돕자는 말을 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기도 하다. 나미는 좋은 사람이지만 그녀가 가난했다면 장미와 같은 입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써니 재결성은 소중한 과거에 대한 추억보다 돈의 힘에 크게 의존했다. 

판타지 혹은 전복

재미있게도 영화는 초반에 병원 장면에서 한국 막장 드라마의 전형성을 비판한다. 어떻게 연인이 알고보니 남매고, 더구나 불치병까지 걸렸단 말인가! 그러나 병실의 모든 이들은 그 막장 드라마를 욕하면서 본다. 판타지에 대한 집단 중독이다. 그러나 이 영화 자체가 거대한 판타지이기도 하다. 픽션인 영화가 판타지라는 건 동어반복일 수 있으나 중요한 대목들이 판타지로 처리되며 그늘이 손쉽게 가려진다.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전경과 시위대의 대치 장면의 코믹한 처리였다. 80년대 중반 전두환 정권이 배경인 이 영화에는 시대로 인한 구김살이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여고생들은 팝송, 가요를 들으며 춤을 출 뿐이다. 그리고 그다지 심각하지도 않은 구역 다툼으로 써니와 소녀시대 집단의 소소한 다툼이 발생한다. 그녀들은 심각한듯 대치하지만 고작 욕을 할 뿐이다. 그녀들이 물리적 충돌을 벌이는 곳은 공교롭게도 전경과 시위대의 충돌 현장이다. 피가 튀고, 최루탄으로 눈물이 났던 그 장소는 단순한 힘겨룸만이 있는 씨름판으로 희화화된다. 하춘화는 쿵푸킥으로 전경을 쓰러뜨리고, 나미는 방패돌리기로 최루탄을 전경들에게 돌려보내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는 남성들의 폭력에 대한 여성의 저항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여성들은 자기들끼리도 물리적 폭력을 교환한다.  

나미가 자기 딸을 괴롭히는 일군의 여고생들을 써니 멤버들과 함께 구타하는 장면도 흥미롭다. 영화는 맞고 들어오는 자식을 위해 부모가 무엇을 할 수 있냐는 질문을 던진 이후 부모가 직접 못된 녀석들을 때려주면 된다는 몰상식한 해결책을 제시하며 웃어넘긴다. 과거 회상은 미화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해도 현실에서마저 폭력을 더 큰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시도가 긍정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녀들은 형사 사건으로 입건되고도 별다른 처벌없이 풀려난다. 춘화의 돈의 힘으로 합의를 이끌어낸 것일까?

진희의 남편이 바람피운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친구들이 맞바람을 피라고 촉구했고 실제로 진희는 바람을 피웠다. 또 친구를 찾는 과정이 흥신소라는 사회의 어두운 제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등 영화는 비윤리적 장면들이 나오지만 별 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웃어넘긴다. 생각대로 하면 되고? 영화가 기존 사회를 전복하려는 것 같지는 않다. 춘화가 아무리 부자라도 바늘 천 개가 한꺼번에 찌르는 고통 속에 죽어가듯이 죽으면 다 부질없으니 현실에 너무 심각해지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때로는 그런 대응이 필요하지만 사회 질서를 유지한다는 차원에서는 위험한 시도들이다. 판타지도 전복도 상상력을 통해 삶의 압박을 느슨하게 하는 정도로 머물러야지 심각한 수준으로 삶에 침투하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나미가 기억하는 과거로서의 과거

영화 속 과거의 장면들은 종종 너무 과장되어 있어 부담스럽기도 했는데 문득 과거는 모두 나미가 기억하는 과거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은 좋아했던 오빠가 수지와 키스를 하는 장면을 보며 크게 상처를 입은 나미가 벤치에 앉았을 때 현실의 나미가 보듬어 안아주는 장면이다. 오직 나미의 마음 속에서만 가능한 장면이다. 돌이켜볼 때 과거 장면에는 모두 나미가 들어있거나 나미의 눈에 보인 것들이었다. 

벌교에서 서울로 전학하여 촌스럽고 사투리 쓴다고 놀림받을까봐 두려움에 떨며 세련된 서울 친구들의 모임 써니에서 나름대로 적응하느라 분투했던 자신의 과거는 왜소한 자아와 어딘가 더 멋져보인 친구들의 모습으로 대조되어 나미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실제로 나미는 써니 멤버 중 가장 작았는데 현재의 모습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영화는 고2 시절을 다룬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나이면 더 이상 키가 급속하게 크기 힘들다. 그렇다면 어린 나미의 키는 더 컸어야할 것이다. 오직 나미의 기억 속에서만 그렇게 자신의 모습이 작았던 것인지 모른다. 

또 80년대 중반과 현재 한국의 삶이 크게 바뀐 것은 사실이지만 객관적으로 존재했던 과거가 아니라 나미의 기억 속의 과거이기에 비현실적인 장면들이 빈번했을 것이다. 군사정권의 상징인 전경이 억압적인 폭력을 휘두른 현실도 어린 소녀에게는 성가신 사회적 배경의 일부에 불과하고, 오히려 나미 자신을 둘러싼 본드 마신 친구의 위협과 소녀시대 혹은 핑클의 괴롭힘이 훨씬 큰 문제였다. 또 수지라는 너무 예쁜 친구가 자신에게 차갑게 구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친해지자마자 그녀가 자신이 좋아하는 오빠와 사귀는 현실에 세상이 무너졌다.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와 현실

죽어가는 춘화는 나미에게 무슨 꿈이 있냐고 물어본다. 나미는 이제와서 무슨 새로운 일을 하겠냐, 살던대로 아내이자 엄마로 살지 않겠냐고 답한다. 춘화는 그러지 말라고, 내 몫까지 잘 살아달라고 나미와 다른 써니 멤버들에게 당부한다. 

여고 시절 써니 멤버들, 아니 모든 청소년들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녔다. 모두가 나름의 꿈이 있었지만 그 꿈을 실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문학소녀 금옥과 미스코리아를 꿈꾼 복희는 꿈에서 완전히 어긋난 현실을 살아간다. 오직 춘화의 유산만이 금옥의 꿈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의 꿈을 접어둔 채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간다.

나미 어머니는 나미의 남편이 경제적으로 성공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나미가 원래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지 잘 알 수 없지만 배우자를 잘 만나 경제적 안정을 얻는 것도 하나의 운이다. 세상의 모든 가능성을 순진하게 믿던 여학생들은 가정 형편, 남성 중심의 사회 구조, 기타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현실의 장벽에 막혀 꿈을 접는다. 

영화는 과거의 잊혀진 꿈을 되새겨보라는 권고를 한 것일까 아니면 미래는 자신의 희망과 완전히 다른 지옥이 될 수도 있음을 경고하려던 것일까. 두 가지 모두 가능한 해석일 것이다. 써니는 사실 별 것 아닌 추억인지 모른다. 영원히 함께 하자던 철없는 약속은 지켜질 수 없었다. 갈수록 각박해진 현재의 삶이 과거를 미화시키고 예전에는 자신이 찬란하게 빛났던 것처럼 기억시킬 뿐이다. 


글이 길어지기만 하면서 정리가 안 되는데 이만 급하게 마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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