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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orary

하얀 리본

by wannabe풍류객 2010.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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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하얀 리본은 격찬을 받은 영화다. 그러나 적어도 한글로 된 영화평 중 완전히 수긍할만한 것은 거의 없다. 무언가 부족했다. 

왈 이 영화가 파시즘의 전조가 1차 대전 이전에 이미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치자. 하지만 영화가 마지막에 1차 대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그걸 알아챌 수 있었을까? 그리고 영화 속의 모습이 독일의 전반을 규정한다고 단정할 근거도 없다. 어디까지나 작은 동네의 일이었고 한편으로 독일이 아닌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엄하지만 위선적인 신부, 지주와 소작농의 갈등, 신의 존재에 의문을 던지는 아이, 아이들의 집단 괴롭힘, 불륜과 패륜의 의사. 무엇이 특별한가? 

굳이 영화가 이런 작은 마을의 사건들과 나치를 연결시키는 의도가 있다면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만약 그런 작은 일들이 세계 대전의 비극을 낳았다면 그런 비극은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다는 경고라고. 꽤나 우중충한 예언이다. 아니 이미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는지도,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의 촬영이나 화면 배치 같은 기술적인 부분의 능수능란함을 칭찬하는 것과 별개로 정말 이 영화가 파시즘, 나치와 연결시킬 수 있는 고리가 강한 것인지는 충분히 의문을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감독도 관객에게 주입시키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럴 수도 있다는 개연성을 암시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비극이 반복될 가능성을 경고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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