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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란드4

로이 킨, 홀란드 사건에 대한 오랜만의 글 알피 홀란드의 아들이 황희찬과 같은 팀인 잘츠부르크에서 뛰어난 공격수로 활약하며 빅 클럽들의 주목을 받다가 도르트문트로 전격 이적하며 그의 아버지, 맨유의 전설 로이 킨의 복수극의 대상이었던 홀란드에 대한 관심이 부활되는 듯 하다. 예전에 블로그에 적었던 로이 킨 복수극 글들에 대한 업데이트로서 최근 '펨코'에 적었던 글을 그대로 가져와본다. 펨코에서 할란드라고 표기한 부분은 홀란드로 수정하였다. 얼링 홀란드라는 어린 축구 선수가 부각되며 그의 아버지인 알피 잉게 홀란드, 로이 킨의 '살인 태클'의 희생자였던 그 선수와 해당 사건이 재조명을 받고 있다. 사실 나는 2011년에 이 사건의 진상이 기존에 알려진 것과 매우 상이하다는 글을 블로그와 아이러브싸커에 올렸고, 이후 내가 조사하고 작성한 글에 기반한.. 2020. 1. 2.
로이 킨 복수극 해부 ④ : 부상 1년 후의 재회, 1998년 11월. 2011/08/10 - 로이 킨 복수극 해부 ①: 충돌의 시작, 1997년 9월 27일 2011/08/12 - 로이 킨 복수극 해부 ② : 프랑스 월드컵 결장의 가능성, 1997년 10월 2011/08/17 - 로이 킨 복수극 해부 ③ : 복수심의 시작 1998-99 시즌이 시작되었고, 로이 킨도 기나긴 장기 부상을 극복하고 돌아왔다. 1998년 여름, 로이 킨은 맨유의 스칸디나비아 투어에 참가했고 아스날과의 채러티 실드 경기를 통해 공식적으로 복귀했다. 경기는 맨유의 0:3 패배로 끝났으나 킨이 경기에 뛸 상태가 되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킨 자신은 10월이 되면 경기 감각을 완전히 되찾을 것이라고 예상했다(미러, 98. 8. 12). 이어진 공식 경기는 챔피언스 리그 예선으로 폴란드의 로즈(Lodz)가.. 2011. 9. 15.
로이 킨 복수극 해부 ② : 프랑스 월드컵 결장의 가능성, 1997년 10월 2011/08/10 - 로이 킨 복수극 해부 ①: 충돌의 시작, 1997년 9월 27일 지난번 글에 이어 로이 킨이 부상을 당한 직후 며칠 동안 그의 부상에 대한 우려가 어떻게 깊어지는지 그 과정을 보기로 한다. 1997년 9월 30일 ~ 10월 3일 리즈-맨유의 경기 후 알피 홀란드가 지적했듯이, 로이 킨은 맨유의 주장이었다. 킨은 전 시즌에 은퇴한 에릭 칸토나의 뒤를 이어 주장이 된 것이다(참고로 칸토나는 스티브 브루스의 후임 주장이었다). 퍼거슨 감독은 로이 킨에게 주장 완장을 채우면 성질이 죽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즌이 시작된지 두 달도 되지 않아 로이 킨은 충분히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고, 자초한 무릎 부상은 최악의 결과였다. 27일의 리그 경기 이후 이틀.. 2011. 8. 12.
로이 킨-알피 홀란드 사건에 대한 거대한 거짓말 이 글을 쓴 지 꽤 시간이 지나갔고 개인적으로는 대형 해외 축구 커뮤니티에 이 글을 소개하기도 하면서 잘못된 내용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기본적인 사실에 대한 왜곡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어떤 이들은 내가 리버풀 팬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글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평가절하했다. 물론 이 사건이 없었다고 내가 로이 킨을 사랑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선수로서의 기량은 존경한다. 내가 마음대로 글을 지어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글 중간중간에 회색으로 표시된 부분들, 즉 외부 링크를 눌러보길 바란다. 내 '주관적'인 서술이 아니라 잉글랜드 언론들이 사건을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 링크들은 이 글을 처음 적을 때부터 존재했지만 아마 많은 이들은 링크를 눌러가며 원문의 내용을 확인.. 2011.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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