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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한국 문학 읽기

은교 (박범신)

by wannabe풍류객 2022.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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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서 알고 있던 '은교'의 원작인 책을 다 보았다. 영화는 아직이다. 영화 개봉 당시 이적요를 연기한 박해일의 노인 분장과 은교를 연기한 김고은이라는 배우의 두각 정도가 화제였던 게 기억난다. 서지우를 이제는 유명해진 김무열이 연기한 걸 알게 됐는데 꽤 어울리는 캐스팅이라 생각된다.

책을 읽은 후 바로 적지 않아 벌써 잊어버린 게 많은 책이 되어버렸지만 느낌을 기반으로 짧게 정리해두고싶다.

책의 핵심은 늙은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대할 것이냐이다. 노인도 성적 욕망이 당연히 있고, 그것은 본능적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아스라져가는 삶에 매달리는 절망적인 몸부림 같은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죽고, 오랜 삶을 살게 되면 노인이 되지만 젊은 시절엔 그 날이 안 올 것처럼 늙음을 무시한 채 살기 십상이다. 박범신 작가에 대해 거의 모르다시피 하지만 선배 작가로서 젊은 세대 작가들에 대한 비판을 책을 통해 은근히 드러내기도 했고, 나이가 든 작가로서의 자화상도 작품에 가미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책은 이적요, 서지우, 은교 3인이 각자 어떻게 서로를 생각하는지를 보여준다. 이적요는 서지우의 성실성, 충성심을 좋아했으나 작가로서 무능함을 경멸했다. 서지우는 이적요를 존경했지만 은교에 대한 눈빛에 질색한다. 이적요는 은교에게 한 눈에 반했고, 그것은 육체적인 차원으로 나타나지만 결국 그 이상이라고 자평했다. 은교는 집에서 학대를 받는 아이로서 시인 할아버지 집을 청소하는 걸 좋아했다. 은교는 이적요-서지우의 결합이 너무 단단해 자기가 들어갈 틈이 없었다고 느꼈다. 서지우는 은교를 이적요보다 먼저 알았다. 둘은 일종의 원조교제였고, 은교는 돈이 아니면 서지우를 만나지 않았을 것 같다.

이적요는 스타 시인이지만 미발표된 산문도 썼다. 드러나듯 그는 산문에도 재주가 뛰어났지만 이름을 이적요라고 붙이고, 시만 쓰는 게 더 잘 팔리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4. 19를 포함해 독재에 저항하는 운동가로 활동하다 오래 수감되기도 했다. 그는 자기의 위선, 은교와의 관계나 돈을 위해 소설을 서지우 이름으로 발표한 일 등을 다 까발려서 자기의 이름이 더럽혀지기를 원했다. 소설의 내용 상 그의 소원은 성취되지 못했을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일기가 진실하다고만 믿을 수도 없다. 서지우의 일기가 때마침 그렇게 상세하게 존재하는 것도 지나친 설정이지만, 이적요의 일기는 설정상 뛰어난 작가가 사실을 어떻게 바꿔서 써놨는지 의심하게 한다. 물론 픽션 속의 일기라는 형식은 진실합니다라고 선언하는 행위이지만 일상 속의 일기쓰기라는 것도 사실을 있는 그대로 쓰지 않고 그럴 수도 없는 일이다. 우리는 사실보다는 이적요의 감정, 서지우의 감정의 일단을 이해해보려 노력할 따름이다.

소설이 외설적이냐가 논란이 될 만큼 소설에는 성적인 묘사가 많았다. 상당 부분은 이적요라는 늙은 인간의 생리적 변화, 상태를 솔직하게 설명하는 걸로 봤다. 노인의 성은 돌아가신 재벌 회장님의 경우에서 드러나듯 빈부를 떠나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일 필요도 있다. 불법이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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