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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여러 버전들의 비교

by wannabe풍류객 2012.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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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관계 때문에 나란히 서있는지 모를 네 단어로 구성된 제목의 책이자 드라마이자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건 작년에 개리 올드만이 출연한 새 영화를 통해서였다. 영국 방송, 신문 등에서 개리 올드만을 자주 다뤘고 아무 것도 모르지만 괜찮거나 논란 거리가 될 영화구나 싶었다. 나중에 보니 영화에 대한 평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그래서 영화도 보고, BBC 드라마도 찾아서 조금 보고, 책까지 사서 읽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 10점
존 르카레 지음, 이종인 옮김/열린책들


드라마을 아직 다 안 봐서 세 개의 장르로 펼쳐진 같은 스파이 이야기를 완전히 비교하긴 어렵지만 흥미로운 점들이 눈에 띈다. 컨트롤이 서커스 내의 몰이 누군지에 대한 중요 정보를 받아내기 위해 프리도를 보내는 부분은 공통적이다. 그러나 소설에서 이 내용은 상당히 후반부에 스마일리가 프리도를 찾아갔을 때 프리도의 증언을 통해 공개된다. 그러나 드라마와 영화는 모두 이 이야기를 초반부에 배치시킨다.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서 효과적인 조치로 보인다.


그러나 최근에 개리 올드만이 스마일리로 연기한 영화 버전이 BBC 드라마에 비해 원작 소설을 많이 바꾼 게 보인다. 프리도가 파견된 장소가 체코가 아닌 헝가리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프리도가 총을 맞는 장소도 숲에서 도심으로 달라졌다. 그 외에도 영화 한 편에 소설을 담아내기에 무리였는지 여러 내용이 바뀐다. 대표적인 게 소설 내내 길럼이 여자친구를 생각하는 반면 영화에서는 길럼이 동성애자로 그려져 그의 파트너로 보이는 인물이 한 컷 등장했다 사라진다. BBC 인기 드라마 '셜록'의 홈즈를 맡은 인물이 이 영화에서는 동성애자 역을 맡았으니 왓슨과 너무 친밀한 걸 빗댄 걸까??


본 순서가 영화->드라마->책이어서 책을 읽는 내내 영상으로 각인된 등장 인물들의 모습이 아른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영화와 드라마는 상당히 다른 컨셉의 인물들을 캐스팅했다. 영화에서는 개별 인물들의 외모에 확실한 특징을 부여했고, 나이가 그다지 많지 않아보인다. 스마일리가 특출나게 늙어보였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모두가 다 노인 같다. 드라마는 1화만 봤기에 독서 중 캐릭터는 주로 영화 속 인물들로 그려졌지만 드라마를 떠올리면 상당히 혼란스러워진다. 하지만 책 뒷편의 저자나 옮긴이의 설명을 보면 드라마는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아마 캐릭터도 드라마가 원작에 더욱 가깝게 그렸으리라.


보통 칭찬 일색인 영화 버전에 대한 평에도 불구하고 씨네21에서는 한 평론가가 허세와 공허의 영화라는 상당히 공격적인 비판을 가한 바 있다. 처음엔 정말 그럴까요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되새겨보면 그런 면이 없지 않다. 확실히 영화에서 창출된 장면이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크리스마스 파티는 원작에서 가장 멀어진 부분이자 시청자를 호도하는 장치인지 모른다. 하지만 인기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라는 점을 감안하면, 즉 영화에서 생략된 내용을 많은 관람객은 이미 소설로 알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 평론가의 비판도 지나친 면이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의의는 번역자께서 본인의 고유한 생각인지 아니면 어떤 좋은 평론을 참고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써주신 후기에 잘 나와 있다. 책을 읽는 와중 그리고 덮은 이후에도 그런 좋은 의미를 다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설명을 읽으면 소설이 생각보다 훨씬 잘 짜여져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주어진 설명에 영향을 받기 이전 영화를 보고 난 이후 내 생각은 이랬다. 이야기의 핵심은 이중 간첩을 잡는 것이지만 결국 컨트롤이 의심한 5인 중 4인이 사실상 이중 간첩 역할을 했던 게 드러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러시아로 강제 소환되기 이전 카를라에게 귀순하라고 설득하던 당시 스마일리의 심리 상태였는지 모른다. 어떤 말로도 카를라를 설득할 수 없던 스마일리는 쓸데없이 자기 아내 이야기를 하고, 또 너나 나나 마찬가지다, 그 체제나 이 체제나, 너라는 스파이나 나라는 스파이나라는 말을 한다. 가장 국익과 애국에 대한 관념이 철저해야 할 국가정보부의 인물이 적의 정보를 얻기 위해 너무 많이 위장하고 또 너무 그 체제의 인물 흉내를 내야하다보니 그리고 무엇보다 그 체제에 대해 너무 많이 알게 되어 결국 회색인이 되어버리는 현상을 말하는게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이중 스파이는 당연한 현상으로 귀착된다.


전공 때문에 눈에 띄었던 것이자 어찌 생각하면 상당히 이상한 게 미국에 대한 설정이다. 기실 냉전이 미소의 대결임이 명백한데, 이 영국 정보부의 이야기엔 영국과 소련의 대결이 치열하다. 물론 그런 일이 없지는 않았겠으나 미국의 존재를 상정한다면 영국의 위상이 지나치게 크게 그려진 게 아닐까 싶다. 007에 비해선 덜하다고 해야할까? 이 이야기에서는 카를라라는 인물로 대변되는 소련의 힘이 영국보다 우세했고, 그들이 영국을 발판으로 미국의 정보에 접근하려고 했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스마일리는 컨트롤의 자리를 꿰차고 바람난 아내인 앤과도 관계를 회복하며 해피 엔딩을 맞지만 소설에선 그럴 가능성들만 비춰진 정도였다. 소설의 성공에 힘입어 두 편의 스마일리 시리즈가 더 나왔다니 그곳에선 스마일리가 정말 아내와 화해하고 컨트롤의 위치에서 카를라와 본격 대결을 펼치는지 모르겠다.


많은 비평가들이 개리 올드만의 스마일리 연기를 칭찬했고, 나 역시 그를 언제나 좋아했기에 호평을 하고 있지만 원작의 맛에는 미치지 못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용을 다 아는 추리 소설을 읽었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구성하여 풀어나가는 존 르카레의 방식엔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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