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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 축구

같은 편과 싸웠던 리버풀: 브라이튼의 나바로와 눈 이야기

by wannabe풍류객 2012.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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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튼과의 FA컵 5라운드 경기는 1시 30분이라는 애매한 시각에 시작되어 생중계를 보는 것은 애초에 포기했다. 리버풀의 분위기가 좋지 많은 않고, 특히 홈 경기에서 무승부가 많긴 했지만 딱히 질 것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 트위터부터 확인해보니 괴상한 말들이 있어 이해하기 힘들었다. OG가 계속 언급되는데 이게 뭔가 어떤 선수의 이니셜인가 한참 고민했고, 상대편이 네 골을 넣었는데 리버풀이 이겼다니 스코어가 어떻게 되는 건가 궁금하기도 했다. 

물론 결과는 리버풀이 브라이튼 선수 세 명의 자책골(OG)에 스크르텔, 캐롤, 수아레스의 골을 더해 6-1로 승리한 것이었다. 경기 막판에 스트리커가 난입하여 캐라를 껴안는 사건도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일에 대해 짧게 적어보고자 한다. 바로 브라이튼의 두 선수 알란 나바로와 크레익 눈에 대한 이야기다. 두 선수는 리버풀 지역 출신이고 리버풀 축구 클럽에도 몸을 담갔던 경력이 있다. 그리고 여전히 리버풀 팬이기도 하다. 

언제나 이야기거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혈안인 영국의 기사들은 이미 두 선수에 대해 다뤘다. 이번 시즌 초반에 리버풀은 칼링컵 대회를 통해 브라이튼과 경기를 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크레익 눈의 이야기가 많이 소개되었다. 이번에는 약속한듯 거의 나바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러나 한국의 리버풀 팬들에게는 이들 선수의 리버풀과의 인연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야기들이 알려지지 않은 듯하고, 더 정확히 말하면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 같다. 프리미어 리그의 선수도 아닌 하위 리그 선수에게 관심을 갖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 두 선수와 리버풀의 인연을 더 상세히 알아보자. 먼저 나바로는 리버풀의 유스 시스템을 거친 후 프로계약까지 맺었던 선수다. 하지만 2000년과 2002년 딱 두 번 후보 선수로만 선수 명단에 올랐을 뿐 정식으로 리버풀에서 성인 무대에 데뷔하지 못했다. 이후 그는 근처의 더 작은 클럽인 트란미어로 이적했으나 여기서도 주전으로 자리를 잡지 못 하고 클럽과 계약을 상호해지했다. 그 다음엔 더 낮은 리그인 컨퍼런스의 애크링턴로 이적했으나 여기에서조차 정착하지 못 했다. 마클레스필드, MK 돈스 등의 클럽과 한 번씩의 계약을 맺은 후 재계약을 하지 못 한 채 다른 클럽을 찾는 신세가 되었고, 마침내 현재 클럽인 브라이튼에 입단하였다. 그러나 브라이튼과의 계약도 이번 시즌 말에 끝나며 30대인 그가 계약 연장을 이룰 수 있을지는 미지수로 보인다. 

여하튼 2000년에 제라드와 함께 리버풀과 프로 계약을 맺었던 나바로는 리버풀 주장과는 매우 다른 어려운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나바로는 원래 풀백으로 시작했으나 리버풀의 권유로 미드필더로 자리를 옮겼고 그것은 불행히도 그보다 한 살 많은 제라드와의 경쟁을 의미했다.

나바로는 지난 9월의 칼링컵 경기에서도 선발로 나와 리버풀을 상대했지만 어제의 경기는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바로 안필드에서 정식 경기로 처음 뛰었던 것이다. 어릴 적부터 안필드에서 뛸 기회는 많았지만 성인팀에서 뛰지 못한 만큼 비록 어제는 상대편으로 나왔지만 리버풀 서포터이자 리버풀 선수였던 그에게 감회가 새로웠을 것이다. 


리버풀에서 후보 명단에라도 올랐고, 리버풀 오피셜 사이트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나바로보다 크레익 눈은 더 운이 없었다. 눈은 리버풀 유스에 있었지만 11살 때 팀을 떠나야했다. 그를 내보낸 것은 라파 베니테스가 해고한 전 리버풀 유스 책임자이자 리버풀의 레전드 중 하나인 스티브 하이웨이다. 눈은 하이웨이가 자신을 항상 격려하며 잘 했다고 칭찬해주었는데도 방출된 것이 '끔찍한'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리버풀을 떠난 이후 그는 내가 듣도보도 못한 아마추어 팀들에서 뛰다가 플리머스를 거쳐 현재의 팀 브라이튼에 입단했다. 지난 9월에 눈을 유명하게 한 스토리는 그가 스티븐 제라드의 지붕을 고쳤던 일화다. 정확히 몇 년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프로 팀에서 뛸 때는 아니다. 그러니까 축구 선수 이외에 다른 직업이 있어야 생계가 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는 제라드의 집에서 아침 여덟 시부터 지붕을 고치며 제라드가 훈련장으로 떠나는 것을 보며 언젠가 그와 같이 축구를 하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은 작년 9월에 이루어졌다.

어제 경기에서 나바로는 선발로 나와 끝까지 뛰었고, 눈은 후보였다가 후반전에 교체로 투입되었다. 제라드의 골로 인정되는가 싶었던 리버풀의 네번째 골 장면에서 나바로는 제라드를 제대로 수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경쟁조차 할 수 없었던 선수를 상대해서일까, 아니면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안필드 관중 속에 많을까봐 걱정하던 눈처럼 친정팀을 상대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까. 아니면 바로 그런 모습이 그가 리버풀을 떠나야했던 이유였을까.

제라드처럼 8번을 등에 달고 나온 나바로였지만 이번 여름에 브라이튼에 남아있을지조차 불확실한 그의 사정을 생각하면 딱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나마 챔피언십에서 뛰는 그는 더 하위 리그의 더 열악한 클럽에서 선수 생활을 하는 많은 선수들에 비해 사정이 나을 것이다. 

거의 불가피하게 해외의 팬들은 각 리그의 수위를 다투는 유명 클럽들을 서포팅하기 마련이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의문을 품을 것도 없다. 하지만 빅 클럽들을 더 빛내는 조연들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FA 컵 대회는 절대로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하위 리그의 클럽이 프리미어 리그 클럽을 만나서 종종 드라마를 연출하는 무대다. 브라이튼의 나바로와 눈에게 어제 경기는 그들이 평생 자랑스러워하는 클럽을 바로 안필드에서 상대했던 꿈같은 시간이었다. 비록 브라이튼의 브리드컷과 덩크가 자책골 퍼레이드에, 혹은 그 몸매가 훌륭한 나체 남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빼앗겼지만 두 선수 모두 조용히 어제 경기를 즐겼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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