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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orary

나의 해방일지

by wannabe풍류객 2022.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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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드라마는 잘 안 보았는데, 근래에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이 '나의 아저씨'가 그렇게 좋다고 하길래 몇 달 전에 봤고, 이제는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길래 '나의 해방일지'까지 다 봤다.

 

1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농사 짓는 장면, 말 안 하고 술만 퍼마시는 구씨, 뜬금없는 염미정의 나를 추앙하라는 대사까지 드라마의 초반은 걸림돌이 많았다. 오래간만에 보는 이민기가 예전 이미지와 너무 달라 신기해하고, 잘 모르지만 매력있는 이엘의 연기를 보며 그리고 무엇보다 외모부터 나의 아버지를 너무 떠올리게 한 천호진 캐릭터 때문에 넘어갈 수 있었다.

 

연애가 되냐마냐 결혼을 하냐마냐가 많은 드라마, 영화의 주요 장치라 그런 재미로도 계속 볼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어머니 캐릭터의 죽음, 아버지의 재혼, 자식들의 서울 생활 등 때 이르게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 놀라기도 했다. 드라마의 제목처럼 현대인의 '해방'에 대한 담론도 볼만했다.

 

그렇지만 끝나고 나서는 이게 뭔가 싶기도 하다. 마치 죽음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어떤 연인의 이별을 자연스럽게 넘어가버리듯 어떤 사랑은 꽃이 피기도 하고, 문제가 해결이 되기도 하고. 시원한 맛이 없달까. 무엇보다 구씨는 술 때문에 뇌가 망가지는 지경인데 염미정은 별로 상관하지 않는 듯 했다. 구씨의 마음의 병이 깊기에 병원 진단이나 치료로 금방 해결될 성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술을 계속 마시게 둬야 하나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민기 캐릭터는 희한하게 여러 사람들의 임종을 지키더니, 운명처럼 장례지도사의 길을 갈 듯 하다. 잘못 들어간 강의실로 운명이 바뀌긴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아득한 옛날 대학 강의실을 잘못 들어가서 예정된 고시생의 길을 가지 않았다. 사실 내가 장소를 제대로 찾아 갔지만 강의자가 법대 교수에서 서어서문 강사로 바뀌는 법대 조교실의 공지를 강의 전까지 몰랐을 뿐이다. 나는 그걸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고시를 조기에 포기하고 긴 방랑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최근의 미국 드라마 중 '지구로 떨어진 사나이' 정도로 번역될 제목의 작품이 있다. 외계인 이야기지만 실상 환경 운동으로 읽힐 수도 있다. 이 작품에서는 지구가 2030년이면 회복불가능 수준을 지나 급속히 망할 거라는 메시지가 반복된다. 뉴욕 타임스는 근래 기후위기에 대한 글을 주요하게 계속 게재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다뤄지는, 연일 이어지는 유럽의 폭염 뉴스에서 느끼는, 이미 임박한 기후 재앙의 시대에 개인의 해방은 어떤 길이 될 수 있을까.

 

근래의 독서로 무언가 깨달음 비슷한 것이 생기긴 했지만 그게 나를 당장 해방시켜줄 것 같지는 않다. 운명 같은 것이 나를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수도 있지만 당분간 그러지 않으리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을 뿐. 앞날은 알 수 없는 일이니. 내가 망해도, 지구가 망해도 우주에서는 수많은 별들이 죽고 태어나고 어떤 지적 존재가 또 나타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임박한 멸망 앞에 국내 정치인들의 권력 다툼은 무슨 의미일지. 죽기 전까지 심심하지 않기 위해서?

 

몇 시간 전에 본 뉴스를 섞자면 이 드라마에서 들개를 다루는 방식도 기억에 남는다. 구씨를 위협하는 듯 했는데, 구씨는 파라솔을 설치하여 호의를 베풀고, 그러나 들개들은 잡혀가고, 남은 들개는 소시지를 제공한 미정을 위협하다가 타박을 받고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사라지고. 그 뉴스에서 들개들은 버려진 작은 강아지 한 마리를 공격해 한 쪽 다리를 망가뜨렸다. 들개들은 들개들의 논리가 있고, 개를 버린 사람들이 윤리를 강요할 수는 없을 거다. 미정이 구씨를 개에 비유한 건 인간 관계에 애초부터 기대를 하지 말자는 메시지일까? 전남친이 돈을 빌리고 튀고 연락하면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이니 최소치의 기대만 갖자는? 하지만 사회는 유지될 수 있을까? 이런 사회는 지속될 의미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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