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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삶은 여행

by wannabe풍류객 2009.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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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행 준비로 며칠 동안 블로그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신종 플루 때문에 3주 가량의 이번 여행이 그리 즐겁지만은 않지만 정말 가보고 싶던 곳에 간다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내 여행과 상관이 없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절벽에서 몸을 던져 전국을 충격에 빠뜨렸고, 공교롭게도 어제는 북한에서 미사일을 발사하여 (나와 직접적으로 상관있는 일인) 환율을 올리고 있는 것 같다.

지난 일요일엔 어머니 생신이 있어서 부랴부랴 하루 일정으로 고향에 다녀왔다. 내일부터 당분간 스페인에 있는데 그 짧은 기간에도 한국에서 나와 관련있는, 내가 있어야 하는 꽤 많은 일정이 있는 걸 보고 놀랐다. 추모 모임(노 전 대통령과 무관한 연례 모임이다), 결혼식, 연주회, 기념일, 강의들, 괜찮은 강연회나 학술 모임 등. 어떻게 '하필' 내가 떠나있는 동안 이렇게 중요한 일들이 많은지 원망스러울 지경이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자 한다. 형이 있으니 만나야 하고, 형이 부탁한 물건들을 전해줘야 하는 건 원초적인 목적이고, 나를 위해 이번 여행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기세 좋게 벌써 수개월 전에 스페인어 회화, 스페인 여행 책자를 샀는데 거의 보지도 않았다. 스페인 여행을 갈 수 있는 일정을 정하는 게 힘들어 그랬던 면이 있지만 막상 준비없이 갈 생각을 하니 후회가 남는다. 조금만 더 공부를 했으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터인데.

남들 다 가 보는 관광지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누구나 다 갔다 올만큼 어떤 지역의 핵심을 드러내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주워 들은 이야기나 인터넷 검색으로도 대강은 알 수 있어서 굳이 가 볼 필요가 없는 곳일 수도 있다. 형은 스페인의 주요 지역을 다 훑어보고, 포르투갈까지 가보는 일정을 권하는데 난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 궁금하고 발길이 머무는 곳을 찬찬히 둘러보고 느끼고 싶다.

전에 기본적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한 곳은 안달루시아 지방이다. 유럽 같지 않은 유럽의 모습, 이슬람의 흔적을 꼭 보고 싶었다. 또 레알 마드리드나 FC 바르셀로나의 경기장은 내 거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갈 예정이었는데, 이제는 몇 개 축구장을 더 가볼 생각이다. 이번 주말로 시즌이 끝나니 리그 경기를 볼 가망은 없지만 스페인 축구의 역사를 느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사람들이 나에게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물으면 보통 공부를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흔히 생각하는 학업의 길을 내가 걷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난 모든 일을 다 공부라고 여기고 있다. 삽질을 하더라도 언제나 작은 깨달음 정도는 얻을 수 있고, 몸이 튼튼해지기도 한다. 삶은 숙제로 가득찬 공부이다. 숙제의 상당량은 남이 부과한 것인데, 남이란 어떤 개별 인간을 지칭하는 것만은 아니다. 인간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태어나는 수많은 숙제들이 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내가 어쩔 도리가 없이 주어진 숙제들을 풀어나가야 하고, 때로는 나 자신이 만들어낸 수많은 숙제더미에 헉헉거리기도 한다. 

막연히 형 집에서 지내면서 이국적인 정취를 느끼겠다는 생각으로 결정한 여행이지만 '나 이런 거 봤다'고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닌, 나와 우리 모두의 숙제를 풀기 위한 끝없는 여행의 중요한 시기가 될 수 있도록 내일 비행기 안에서부터 더 고민해야겠다.

노 전 대통령은 파란만장한 삶의 여행을 끝마치며 남겨진 한국 국민들에게 거대한 숙제를 던져주었는데 내가 스페인에 가 있는 동안 엄청난 혼란이 빚어질 것 같아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 물리적 폭력으로 점철된 갈등이 아니라 던져진 숙제를 현명하게 풀기 위한 숙의가 있기를 바란다.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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