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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orary

이상한 대회, 동화의 끝

by wannabe풍류객 2009.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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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 오늘 끝났다. 한국 대표팀은 일본 팀과 이번 대회에서 다섯 번이나 경기를 치른 끝에 결승에서 패하며 준우승의 성적을 거뒀다. 놀랄 일이다. 언론에서는 '사상 최초'로 한국 팀이 결승에 올랐다며 환호하고, 특집 기사, 특집 방송을 쏟아냈다. 이제 '2'회인 대회에서 '사상 최초'를 논하는 건 좀 머쓱한 일이 아닌가 싶지만 올 WBC에 참여한 한국 팀의 사정이 그렇게도 안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 아는 대로 박찬호, 김병현, 이승엽, 구대성, 최희섭, 박진만 등 그간 대표팀에서 활약한 선수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참여하지 못했고, 올림픽 금메달을 이끈 김경문 감독은 이번엔 맡지 않겠다고 했고, 각팀 감독들도 대표팀의 코칭 스태프 참석을 고사했다. 이번 대표팀은 구성하기가 쉽지 않았고, 큰 준비를 하지 못한 탓에 대개 사람들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에 콜드게임패를 당하고 중국이 대만을 이기는 걸 본 다음엔 1라운드 통과도 어렵지 않은가 우려할 정도였으니.

1라운드 순위 결정전은 동화의 시작이었다. 경기전부터 그런지 모르지만 이 경기를 이기면서 한국은 아시아 최고의 팀이 되었다고 환호했다. 근래 성적으로 보아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니지만, 야구 인프라, 역사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한 일본의 존재 때문에 쉽게 아시아의 맹주가 되었다고 장담하긴 어렵다. 그런데 2라운드에서도 일본을 이기며 2연승을 하자 대회에 대한 기대치는 걷잡을 수 없이 부풀려졌고, 야구의 종주국 미국의 빈약한 경기력과 전통의 강호 쿠바가 일본에 맥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한국팀의 대회 우승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언제봐도 일본 팀과의 경기에서 한국 팀은 열세였다. 땅볼을 쳐대는 이치로 덕분인지, 한국의 좋은 수비 덕분인지 일본은 언제나 많은 안타를 치고도 그에 합당한 점수를 내지 못했다. 일본의 입장에선 억울할 테지만 한국은 베네수엘라까지 이기고 결승에 오르며 또다시 일본을 곤란하게 만들면 충분히 우승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살아난 추신수와 꽃범호의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봉중근 의사는 3번의 기적을 만들진 못했고 수비진도 이전 경기들보다 더 흔들렸다. 결국 일본은 또 많은 안타를 쳤고 승리했다.

대회방식이 이번 대회와 달라서, 그러니까 일본과의 경기가 적었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한국은 2라운드에서 탈락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오늘처럼 결승에 올랐을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그러나 상황이 달랐더라도 일본이 결승에 오를 가능성이 더 커 보이긴 한다.

우리는 미국이 만든 새로운 세계야구대회를 두 번 다 싹쓸이하는 일본을 씁쓸하게 지켜보게 되었다. 힘들게 힘들게 9회말에 동점까지 만든 터라 아쉬움이 더 컸다. 그러나 9회말에 강타자들을 다 빼고 대주자를 내며 승부를 걸었지만 성공하지 못했을 때 운명은 결정되었다. 연장에도 일본은 잘 쳤지만 한국팀 타자들은 더 약해졌으니.

경제가 어려울 때 국제 무대에서 활약하는 스포츠 스타와 대표팀은 어쩔 수 없이 국민의 희망이 되고 스트레스를 발산할 수 있는 대리인이 된다. 한국은 우승 문턱에서 하필 일본에 무너졌기에 준우승이라는 엄청난 성적을 거두고도 뒤끝이 좋지 않다. 이제 곧 새로운 프로야구 시즌이 시작되는데 과연 얼마나 흥행하게 될지는 의문이다. 경기를 TV로 보는 것과 경기장에서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적자가 만연한 한국 프로 스포츠가 살아나려면 경기장에 관객이 들어차야 할텐데 좋지 않은 주머니 사정 때문에 경기장에 가는 관중은 줄어들 것이다. 지상파에서는 여전히 가을이나 돼야 중계를 해줄 것이다. 대회 메인 스폰서는 구해졌나 모르겠다.

이번 대회의 성적은 한국 야구계에 더 큰 투자를 해야한다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줄 것이다. 그런데 누가 할 것인가? 기업들이 몸을 사리고 쓰러지는 마당에. 사람들은 쉽사리 unlikely hero에 환호하지만 또 다른 영웅의 등장을 그저 지켜보기만 한다. 인프라가 없으면 어떤 대회에 가서는 형편없이 무너져버릴 수 있다. 구단이 자립하지 못 하는 한국 프로 스포츠의 상황에선 히어로즈 같이 파행적으로 운영되는 구단을 추가로, 지속적으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대표팀은 언제나 동화를 기대할 수밖에 없고, 이상한 대회 때문에 부풀려진 기대를 품을지도 모르지만 터진 거품의 충격과 허무함은 더 크다. 그래도 당분간은 열심히 뛴 한국 대표 야구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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