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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 축구

주말 경기에서 함께 96개의 풍선을 날릴 제라드와 비디치

by wannabe풍류객 2012.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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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전 96명의 죽음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포털 사이트의 댓글을 보는 것만큼 허탈한 재미를 안기는 것도 흔치 않다. 도대체 '영국' 축구, 그리고 이제는 '중위권' 팀에 불과한 리버풀 팬들이 죽었던 게 지금 한국에서 인터넷 포털의 스포츠 기사를 보는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일까. 어떤 이는 네이버에서 지난 주부터 왜 자꾸 이 사건에 대한 기사가 올라오는지 모르겠다며 푸념했다.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입석 응원문화가 일반적이었던 1980년대까지의 잉글랜드 축구의 특성이 클럽과 경찰의 잘못된 경기장 통제와 어우러져 힐스보로 참사가 빚어졌던 것을 알고 있다. 지금처럼 좌석이 지정되어있었다면 아무리 티켓 확인이 늦더라도 자리가 더 있는 줄 알고 사람들이 계속 같은 자리로  몰려들어 압사로 이어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힐스보로 참사의 결과 때문에 잉글랜드 축구엔 좌석이 강제로 도입되었다. 비록 경기장 개조의 결과가 지속적인 티켓 가격의 인상, 그로 인한 소득 하위계층의 축구장 출입 감소로 이어졌지만. 


현대 한국인 대부분이 경험하는 'EPL'은 힐스보로 참사 이후의 완전히 달라진 잉글랜드 축구다. 너무 당연시되는 프리미어 리그의 위성 생중계. 한국 선수들이 뛰며 더욱 친숙하게 느껴지는 EPL은 원래 그런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힐스보로라는 엄청난 참사, 트라우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세계의 많은 이들이 좋아할만한 프리미어 리그의 근사한 외형은 힐스보로 참사라는 사태로 노출된 잉글랜드 축구, 잉글랜드 사회의 치부를 가리기 위한 조치의 결과였다. 


이제 이번 일요일에 있을 리버풀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안필드 경기에서 두 팀은 합심하여 96명의 희생자들을 기리게 된다. 그 경기에서 양 팀의 주장으로 나설 예정인 제라드와 비디치가 96개의 빨간 풍선을 하늘로 날려보내는 것은 물론 안필드의 4면 중 세 곳의 스탠드에서 진실(The truth), 96, 정의(justice)라는 글자를 보게 될 것이다. 


양 클럽의 적대적인 역사에 더해 작년의 수아레스-에브라 사건으로 양 팀 팬들의 적개심은 더욱 증가하며 지난 금요일 퍼거슨 감독이 자제 요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맨유 팬들은 위건 경기에서 "언제나 희생자라고 하지, 너희 잘못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하지"라는 함성을 질러 비난을 받았다. 사실이라고 믿지만 그 챈트(chant)는 수아레스와 그를 변호하는 리버풀 팬들에 대한 조롱으로서 작년부터 있어왔던 것 같다. 하지만 무고한 리버풀 팬들이 23년 전에 사망하고, 경찰이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조직적으로 사실을 은폐하고 거짓말을 지어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난 그 주말에 리버풀도 아닌 위건과의 경기에서 맨유 서포터들이 그런 챈트를 굳이 했어야했을까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는 온갖 억울한 죽음들이 넘쳐나므로 이 96명의 죽음은 한국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무 의미없는 일일 수도 있다. 내 관측에 따르면 심지어 리버풀 팬을 자처하는 팬들의 대부분도 힐스보로 참사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힐스보로 참사에 대한 제대로 된 글이 거의 없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단순화의 위험성을 감안하고 잉글랜드 축구가 힐스보로 참사를 겪지 않고 지금까지 왔다고 가정한다면 언젠가 일어나고 말았을 그 참사의 희생자 중에 어떤 영국 축구를 좋아하는 한국인이 포함될 수도 있다. 


어떤 죽음이라도 가벼이 여길 수는 없다. 누구라도 죽음은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프리미어 리그가 최상의 형태인지는 논외로 치더라도 프리미어 리그가 세계적인 인기 리그가 되고, 또 그래서 한국 선수들이 그곳에서 뛰는 게 자랑스럽게 된 배경에 100명에 가까운 인명 희생이 있었다는 것은 기억해둘만하다. 


한국 사회에서 정의를 찾기 어렵다고 하지만 선진국으로 여기는 영국에서조차 힐스보로에서 어린 자식들을 잃은 희생자 부모들의 끝없는 노력이 23년이 걸려서야 결실을 맺은 걸 보면 정의란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님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축구에 관심이 없고 리버풀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96명의 리버풀팬들의 죽음과 이어진 희생자 가족들의 노력은 정의를 찾는 험난한 여정의 사례로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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