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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긴 여정을 지나 드디어 로이 킨이 알피 홀란드에게 복수를 감행한 날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 날의 일의 많은 부분은 예전 글(2011/03/11 - 로이 킨-알피 홀란드 사건에 대한 거대한 거짓말)에서 다룬 바 있다. 하지만 당시의 신문 기사들을 꼼꼼하게 읽어보면서 전에 몰랐던 사실들을 많이 발견했다. 1
2011/08/10 - 로이 킨 복수극 해부 ①: 충돌의 시작, 1997년 9월 27일
2011/08/12 - 로이 킨 복수극 해부 ② : 프랑스 월드컵 결장의 가능성, 1997년 10월
2011/08/17 - 로이 킨 복수극 해부 ③ : 복수심의 시작
2011/09/15 - 로이 킨 복수극 해부 ④ : 부상 1년 후의 재회, 1998년 11월.
결론적으로 말해 이 날 로이 킨의 거친 태클은 완전히 계획된 것이었다거나 순전히 홀란드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벌어진 것이 아닌 것 같다. 97년 부상으로 이어졌던 로이 킨의 태클이 당시 경기장 안팎의 말썽의 여파였듯이 2001년의 태클도 그 경기 이전에 생겨난 킨의 좌절감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이다.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를 짚어보기로 하자. 우선 2000-01 시즌 맨유는 일찍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그 시점은 사건이 발생한 맨유와 맨시티의 경기가 있기 일주일 전이었다. 그러나 맨유는 곧바로 챔피언스 리그에서 바이에른 뮌헨에 패하며 탈락했고, 킨은 팀 동료들의 수준을 비하하며 구설수에 올랐다.
리그 우승을 밥먹듯이 했으면 된 것이지 챔피언스 리그에서 탈락했다고 신경질부리는 게 과한 일이 아닐까 싶지만 맨유의 리그 성적이 너무 좋았기에 리그 우승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을 수 있고, 승리를 언제나 갈망하는 킨의 성격 탓일 수도 있겠다.
이유가 무엇이건 이날 경기가 있기 전부터 로이 킨은 매우 기분이 나빴다. 경기 시작 전 맨 시티 선수 위틀리의 악수도 거절했고(썬데이 메일), 경기 초반부터 옐로우 카드를 받을 뻔 했으나 심판이 좋은 말로 타이르며 넘어가기도 했다. 또 경기 도중에 솔샤르나 개리 네블 같은 자신의 팀 동료들과도 언쟁을 벌였다.
이미 우승을 확정한 이후 맨유가 리그에서 최선을 다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맨체스터 더비이기 때문일까, 강등을 피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던 맨 시티에게 쉽게 앞서가지 못했기 때문일까 로이 킨은 경기가 진행될수록 더욱 기분이 나빠진 모양이다.
실제 맨유는 첫번째로 얻은 페널티킥을 스콜스가 놓쳤다. 그러나 10분여 후에 다시 두번째 페널티킥을 얻는데, 골키퍼인 바르테즈가 자신이 차겠다고 경기장을 가로질러 뛰어와 귀찮게 하는 사이 테디 셰링엄이 침착하게 성공시키며 앞서 나갔다. 그러나 얼마 후 종료를 얼마 앞둔 상황에서 코너킥을 얻은 맨 시티가 동점을 만드는데 성공하며 경기는 무승부로 끝날 예정이었다.
바로 이 시점이다. 로이 킨은 며칠 전부터 생긴 짜증에 더해 경기 내내 유나이티드와 시티를 가리지 않고 모든 선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길 것 같은 경기가 막판에 무승부로 결정되기 직전이다. 로이 킨은 폭발했고, 알피 홀란드를 향해 그 살인적 태클을 날렸다.
주심 데이빗 엘러레이는 선택의 여지 없이 레드 카드를 꺼냈다. 맨유 선수로서 로이 킨의 8년 생활 동안 여덟 번째 레드 카드였고, 선수 생활하는 동안 엘러레이 주심으로부터 네 번째 레드 카드를 받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 불명예스러운 퇴장에도 맨유 팬들은 기립 박수를 보냈다니(썬데이 미러) 돌이켜보면 기가막힐 일이지만 더비 경기의 독특한 성격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으리라.
경기가 끝난 후 인터뷰에서 퍼거슨 감독은 무조건적 선수 감싸기에 나서며 자신은 태클 장면을 못봤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클럽 관계자를 통해 알아보니 퇴장감은 맞더라고 말하며 태클의 심각성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킨의 경고나 퇴장 문제를 우려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퍼거슨은 그 시즌에 킨이 카드를 하나밖에 안 받았는데 무슨 걱정을 하냐며 역정을 냈다(실제로는 옐로우 카드 5장이 있었다. 더 옵저버).
퇴장을 당했기 때문인지 22일자 신문에서 로이 킨의 인터뷰는 찾아볼 수 없다. 맨 시티의 조 로일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뉴스 오브 더 월드).
두 선수가 서로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지는 않죠.
알피는 태클을 당할 때 그의 다리가 공중에 있었던 것이 행운이었다고 말했어요. 왜냐하면 다리가 땅 위에 있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다리가 어딨는지 찾고 있을 수도 있거든요.
주심이 킨을 퇴장시킨 것은 옳아요. 그리고 퍼기가 이견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알피 홀란드는 허세 섞인 농담을 하며 킨에 대한 적대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여러 기사의 인터뷰가 조금씩 다른 부분이 있는데 종합해서 하나로 모아보았다(텔레그라프, 썬데이 미러, 메일).
[태클을 당하고 누워있는 저에게] 킨이 뭐라고 말했는지는 말하지 않을께요. 그다지 좋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저에게 커피나 마시러 가자고 말하진 않았어요. 분명히.
그냥 제가 그의 싸인을 요구하지 않을 거라고 말해두기로 하죠. 저는 단지 그가 저에게 태클을 했을 때 제 다리가 땅에서 떨어져 있었다는 점에 기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 크게 다쳤을 수도 있어요.
저는 다음 번 유나이티드를 상대하기 전에 제 보험을 업그레이드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이런 종류의 경기에서는 언제나 태클들이 있지만 킨의 그 태클은 사상 최악이었어요. 분명한 퇴장감이죠. 우습지만 1997년 이후 킨은 제 눈을 똑바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저는 이게 심각한 부상이 아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어요. 저는 다음 주 불가리아를 상대할 노르웨이 대표팀 명단에 있었는데, 이제 저의 대표팀 복귀를 늦춰야 할 것 같네요.
나중의 일을 감안하면 중요한 대목들이 많이 나오는 인터뷰였다. 홀란드는 이 때까지만 해도 다리가 부러지지 않은 것에 안도하고 있었다. 부상의 심각성은 알 수 없지만 부상이 있었던 것은 확실했다. 이 날만 해도 노르웨이 대표팀 경기에 나설 수 있을지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험 업그레이드를 운운한 그의 농담에도 불구하고 불행히도 그는 다시는 맨유를 상대로 경기를 하지 못햇을 것이다. 전에 쓴 글에 적었지만 이후 그는 한 번도 한 경기를 완전히 뛰지 못하게 된다.
다음 번 글에서는 4월 23일 이후의 신문 기사를 통해 이 끔찍한 태클에 대한 당시 영국 사회의 반응은 어땠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2011/11/24 - 로이 킨 복수극 해부 ⑥ : 킨을 용서하려했던 알피 홀란드
- 이 글에서는 2001년 4월 22일의 기사만 다룬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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