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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홍학의 자리 - 정해연

by wannabe풍류객 2024.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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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인터넷 게시글에서 어떤 글을 보았다. 결말을 알고 다시 처음을 보면 깜짝 놀라며 이해한다는 식의 책이 있다는 것이다. 동네 도서관에서 검색을 해보았다. 몇 군데, 아주 작은 분소까지 포함해 몇 권이 있는데 모두 대출 중이고 예약이 거의 다 찬 상태였다. 책은 나온지 3년 되었으나 올해 역주행 중이라 한다. 정해연의 소설 '홍학의 자리'다.

 

이 글은 내 감상평이므로 당연히 스포일러가 포함된다. 그런데 이 책의 스포일러는 너무 결정적이기 때문에 책을 안 읽은 사람이 이 글을 읽는다면 아래 접힌 내용은 지금 읽지 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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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설정은 희생자인 다현이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내 감각에서 다현이라는 이름은 여성 이름이라, 작가가 이걸 남자 이름이라고 쓴다는 점을 쉽사리 납득하긴 어렵다. 다른 사람들의 후기를 보면 중성적 이름이라는 평도 많긴 하다.

 

작가는 분명히 다현이라는 이름과 다양한 묘사를 통해 다현 캐릭터가 여성이라고 오해하도록 만들었다. 그것이 작가의 의도이자 최대 장치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내가 보기엔 무리수였다.

 

그러나 다현이 여성이 아닌 남성임으로 인해 준후의 죄책감은 더욱 커질 수 있었다. 남교사와 여학생 혹은 여교사와 남학생의 불륜은 흔한 이야기다. 오래 전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에서 남선생 남학생의 연애가 전생이라는 장치를 통해 합리화된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별 배경이 없이 소설에서는 두 남성, 교사와 학생이 동성애에 빠진다.

 

홍학의 자리라는 책의 제목처럼 다현은 홍학에 집착했다. 홍학이라는 동물에서 동성애가 발견된다는 과학적 관찰을 작가가 적극 채용하였고, 소설 속 캐릭터인 다현도 소수자인 동성애, 그것도 교사와의 동성애를 탐하는 자신의 존재를 합리화하기 위해 홍학과 네덜란드를 갈구했다. 아마 그런 과학적, 생물학적 지식이 있는 독자라면 다현이 남성임을 더 일찍 알아챘을 것이다.

 

이것만큰 중요한 설정은 준후라는 캐릭터의 악마성이다. 소설의 거의 처음부터 직접적으로 준후가 악마라는 규정이 등장했다. 그러나 그가 학생과의 선을 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희생자를 사랑했고 그가 살인자가 아니라는 점 때문에 그를 한동안 동정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아내를 사랑하지 않고 자식은 전혀 신경쓰지 않음은 물론 다현에 대한 사랑도 그다지 깊지 않았다. 더 중요하게는 다현이 실제 죽었는지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고, 자신의 알리바이를 위해 실제 다현의 최종적 죽음을 완성했고, 학교 경비원의 죽음도 방치했다. 소설의 결말은 그가 경비원의 죽음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았음을 안도하는 장면이다.

 

소설은 공부를 많이 하고 쓴 흔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굳이라고 싶을만큼 혹은 과도하게 각 직업군의 특징적인 부분들이 집요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성실성이라고 높게 평가할 수도 있으리라. 과학적 혹은 논리적 설명에 있어서도 구멍이 있지 않도록 기울인 노력도 발견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소설은 재미가 있었다. 동성애 코드, 교사의 악마성, 이웃의 사기로 인한 지역 사회의 붕괴 등 사회적 의미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들의 평에서 얼핏얼핏 드러나듯 작위적이라고 느껴질 부분도 많았다. 캐릭터들이 너무 도구적으로 동원되었다는 평가에 동의가 된다. 은성이 사기 사건으로 인해 다현에게 원한을 가졌다는 점은 비교적 초반부터 쉽게 유추가 가능했으나 소설에서는 조금 늦게 드러난다.

 

나의 독서 경험상 한국 소설, 아니 최근엔 외국 소설도 잘 보지 않는데,의 최근 수준에서 이 책의 위치를 가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재미와 의미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완성도가 얼마나 높은가는 의심스럽다. 웹소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웹소설 같다는 이 소설에 대한 평가는 칭찬이 아닐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모든 소설이 고전소설 같을 필요는 없고, 이젠 웹소설이 대세인지도 모르겠다. 예전의 고전소설도 다수는 지금의 웹소설처럼 당대의 독자에게 페이지터너였음을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여하튼 이 책이 시간 때우기 이상의 의미가 높지 않다는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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