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 오리지널 드라마였으나 그런 줄도 몰랐고, 보려다가 계속 기회를 놓쳤던 “높은 성의 사나이” 시리즈를 봤다. 필립 K. 딕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으나 많은 내용이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소설의 등장인물 소개를 보았는데 드라마보다 훨씬 적었다.
다 본 감상, 특히 시리즈 피날레에 대한 감상은 어리둥절로 요약된다. 시즌 초반부터의 메인 캐릭터들이 뜬금없이 죽어나가서 어리둥절했고, 피날레에서 갑자기 쏟아져들어온 사람들은 누구며 멀티버스 이동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듯한 태도는 더욱 이상했다. 무엇보다도 그 이방인들은 저항군들이 분명히 보일 터인데 그들을 신경쓰지 않고, 이제 무너져가고 있다고 해도 나치와 일제가 세계를 지배한 유니버스로 걸어들어간다는 것도 이상하다. 이 시리즈를 얼마나 끌고 갈 생각이었는지 몰라도 적어도 시즌4는 급한 마무리를 위해 무리하게 진행한 게 분명해보였다.
정신을 집중하면 갑자기 멀티버스로 이동할 수 있다는 설정 자체를 받아들이는 게 큰 장벽이긴 한데, 이제는 마블에서 멀티버스를 전면적으로 수용해서 써먹고 있으니 나처럼 나중에 이 시리즈를 보는 사람들의 거부감은 덜할 것이다. 적어도 마블은 왜 멀티버스를 도입하는지를 설명하지만 이 시리즈에서는 누군가 특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그런 이동을 할 수 있다. 왜 그런 능력을 가졌는지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소설 초반부를 보건대 주역 공부를 열심히 하면 가능한 듯하다.
주인공인 줄리아나 크레인 캐릭터의 매력(어떤 이들은 답답하다고 느낀 모양이나)은 드라마의 매력의 큰 부분이었다. 크레인 역의 배우 다발로스는 다른 작품에서는 눈에 띄는 활약을 한 적이 없었다. 아마 존 스미스를 연기한 루퍼스 슈얼이 이런저런 작품에서 가장 많이 본 배우인데 딱히 그의 어떤 출연작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일본인들이 대거 출연해야해서 그동안 할리우드에서 동북아시아계 역할을 맡아온 여러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주인공 중 하나인 키도를 연기한 배우는 왠지 한국계로 오해했는데 부모님이 필리핀계로 이 사람은 뉴욕 태생이었다. 이름은 조엘 델 라 푸엔테.
완결성이 떨어진 작품의 설정을 깊이 따지는 건 의미가 별로 없을지 모른다. 가만 보니 멀티버스와 평행세계가 좀 다른 건 같긴 한데 이 작품은 평행세계라고 보는 게 맞을 듯 하다. 평행세계가 물리학적으로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모양이나 나와 똑같은 존재가 다른 세계에서 다르게 살고 있다는 건 납득이 안 된다. 가령 또 다른 나가 평행세계에 있다고 치면 후손들은 어떻게 될까? 작은 선택이 배우자를 바꿀 수도 있고, 결혼을 못 할 수도 있고, 평행세계의 다른 인간들도 여러 선택들로 인해 다른 결과들을 낳을 것이다. 그렇다면 평행세계의 수는 무한대에 가까울 수밖에 없고, 이것이 상상의 세계가 아니라면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피날레 직후 제작자의 인터뷰를 보건대 작품의 기본 취지는 현실보다 훨씬 나쁜 세계로 갔을 수도 있었던, 또 그런 세계에서는 이런 모습일 꺼라는 지옥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The plot against America가 1940년대까지를 유사한 정서로 그렸듯이 트럼프 시대에는 이런 드라마들이 많이 나왔다.
시즌4에서 가장 반어적으로 웃긴 장면은 미 서부에서 일본이 물러나고 흑인들이 정권을 잡게 되자 미 동부의 나치 세력이 흑인 지배자를 타도하라는 삐라를 비행기로 뿌려대는 부분이었다. 나치 지배하의 흑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드러나지 않다가 나중에야 갑자기 나타나는데 역시 인종청소를 당한 모양이다. 이거야말로 가장 으스스한 대목이다. 나치 친위대장의 아들이라도 이상한 병에 걸리면 잡혀가서 죽는 마당에 애초에 미 동부 씬들에서 등장하지 않은 흑인들의 부재를 느끼지 못한 건 오히려 멍청한 일었다. 무엇보다도 이 설정이야말로 이 드라마를 시즌4까지 보고 난 후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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