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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orary

주인과 노예, 혹은 신

by wannabe풍류객 2009.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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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살 어린 한 친구가 호주에 다녀왔다길래 어학연수인가 싶었는데 농장에서 일을 죽도록 했다고 한다.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호주의 백인이 아니라 아시아 각국에서 온 황인종들이라고 한다. 얼마전엔 호주에서 젊은 두 남녀가 죽은 채로 발견되어 안타까움을 더했는데 영어 배우고, 일해서 돈도 벌 목적으로 호주 농장을 향하는 한국의 젊은이가 많은 모양이다. 호주의 농장주들이 착취를 한다는 소리는 못 들었으니 말릴 일은 아니지만 왠지 모를 씁쓸함이 생기곤 했다. 

며칠 전엔 아주 씁쓸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리 기계화가 되어도 농업엔 손이 많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최근엔 농장이 기업화되는 곳도 적지 않은가 보다. 여하간 한국의 농장주들이 주로 태국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들을 쉬지도 못하게 하고, 여권, 외국인등록증을 빼앗고, 성추행도 한다는 얘기였다. 호주에서 기꺼이 백인을 위해 노동자가 되길 자처하는 한국인들이지만, 한국에 온 외국인 노동자들을 아주 천하게 여기는 걸 당연시하는 것 같다. 

씁쓸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한국인의 사고에 아주 불합리한 점이 있는 것 같다. 호주 농장에서 돈을 얼마나 주는지 몰라도 비행기값에 체재비를 따지면 버는 돈 중 상당액이 한국에 돌아오기 전에 지출된다. 영어 능력을 크게 향상시킬 시간이 있을까? 돈을 벌고 나서 호주의 학원, 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한다면 모를까 그다지 장기로 머물지도 않는 기간 속에 백인의 눈치보며 일만 하는 동안 영어가 늘까? 외국에서 일해본 독특한 경험말고는 그다지 얻는 게 없어 보인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의 농장에서 일하면 어떨까? 한국의 농장주들이 태국인들을 대하듯이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좋은 대우를 받기를 기대하기도 어려우니 젊은이들이 한국 농장을 굳이 가려고 할 것 같지도 않다. 3D 업종의 노동력이 글로벌하게 움직이는 건 일견 자연스러워보인다. 문제는 사람에 대한 태도다. 외국인 노동자는 어느 나라에서나 환영받기 어렵다. 하지만 자국민이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업종에서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노예가 아니다. 말이 잘 통하지 않고, 국내에 관련 법률이 정비가 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을 착취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태국으로 돌아가서 한국에 대해 어떠한 험담을 해도 우리는 할말이 없고, 한국에 대해 증오를 품은 외국인이 많아지는 건 결코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래 지적된 것이지만 외국인을 대하는 우리 속의 이중성을 고치지 않으면 글로벌 사회의 일원으로서 인정받기 힘들다. 우리가 우리에게 당당해져야, 자부심을 느낄 수 있어야 가능할 일이다. 

배틀스타 갈락티카를 최근에 보고 있는 중인데 흥미로운 철학을 제시하는 드라마다. 인간이 만든 기계인간(Cylon)이 반란을 일으키는 흔한 설정인데, 인간형 싸일런들은 스스로를 인간인 것으로 생각하게 프로그램되어 있어서 인간보다 인간다운 경우도 있다. 가장 재밌는 건 싸일런들이 신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신이 선택한 건 싸일런이고 인간은 망해야 할 존재들이다. 존재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 것이 인간이 주입한 프로그램 때문인지 언제가 갑자기 기계들이 자각을 해서인지는 아직 나오지 않지만, 인간의 피조물들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여겨지는 신을 거들먹거리며 자신의 존재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게 여간 재미있지 않다. 더 큰 뒤틀림은 인간형 싸일런을 만든 건 인간이 아니라 싸일런들이라는 것이다. 결국 기계가 인간을 만들게 되는 반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제 양쪽의 경계는 아주 흐려지게 되지만 서로가 서로를 파괴하려는 움직임은 그침이 없다. 별 이유도 없이 약간의 차이 때문에 폭력을 일삼는 인간 사회에 대한 은유와 경고로도 보인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노예인가. 그저께 쯤 본 스페인의 라틴 아메리카 정복사 다큐멘터리는 수천만의 인디오를 죽음으로 이끈 잔인한 스페인 군인, 상인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그 '사업'을 거리낌없이 수행했음을 증언한다. 신의 이름으로 사랑하기보단 적, 이방인, 타자를 처단하는 것이 더욱 쉬운 일인 걸까? 생각이 더 떠오르지 않아 이만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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