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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시작 직전은 누군가에겐 작별의 시간이다. 새로 들어오는 사람도 많지만 과정을 끝내거나 잠시 휴학을 하거나 혹은 무언가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떠나가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공부하는 사람의 애증의 대상인 책들이 종종 재활용 쓰레기장을 차지하게 된다. 에어컨 바람이 갈수록 차갑게 느껴지는 요즘 감기 기운을 느끼며 일찍 학교를 나오다가 쓰레기통에 책들이 쌓여 있는 걸 보았다. 그 중에 사전 한 권이 있었다.
이름하여 시사 엘리트 로열 영한 사전이다. 가죽 커버가 고급스러움을 더하고 있고, 거의 3천 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두께가 믿음직스럽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손이 가며 왜 이렇게 좋은 사전을 버리는 거지라며 의아해하다가 요즘 전자사전이 넘친다는 걸, 이런 무거운 사전은 오히려 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지 않아도 불과 두 시간 전 졸업하며 책을 여기저기로 뿌리고 있는 후배와 책이 짐이라는 얘기를 했던 차였다. 나도 무거운 책 대신 킨들 같은 전자책을 갖고 싶었다.
어찌어찌 손에 쥐게 되긴 했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었다. 마치 점심 때 동네 한 켠에 위치한 멀쩡해보이는 버려진 소파를 보고 갈등하던 것과 같이. 연한 노란빛의 그 소파는 너무 탐나고 유혹적이었지지만 내 방이 너무 작다. 3년 전 쯤에 전자사전을 산 이후로 종이사전을 쓰지 않음은 물론이고 전자사전마저 인터넷 사전에 밀리기 일쑤였다. 내 손 안의 이 사전을 그다지 많이 보지 않을 거라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어느새 사전은 가방 안에 들어갔고 집까지 같이 왔다.
찾는 시간으로 따지면 자판이 작은 전자사전보다는 키보드로 영타를 빠르게 칠 수 있는 인터넷 사전이 더 낫다. 인터넷 접속 상태여야 한다는 작은 문제가 있지만. 그러고보니 종이사전을 찾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몇 초 책장을 후루룩 넘기다보면 찾을 수 있다. 위 아래로 있는 연관어, 파생어도 덤으로 보게 된다. 우연히 보게 되는 사진 속의 그림을 통해 모르는 단어를 배우기도 한다(어릴 때 그림 많은 사전이 참 부러웠다). 게다가 가죽 커버 사전은 가져본 적이 없다. 이만하면 충분히 합리화가 된 걸까?
작은 내 방에 책의 성을 쌓고 있는 요즘 두꺼운 사전은 훌륭한 벽돌이자 병사가 될 것 같다. 멋진 성을 짓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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