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요즘 축구 관련 글을 보면 '크랙(crack)'이라는 말이 아주 자주 보인다. 리버풀 팬사이트 tp에서는 지난 시즌 홈에서 양산한 무승부를 두고 '크랙'이 없어서 일어난 결과라는 주장이 많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도대체 '크랙'이 뭐지? 이 단어를 볼 때마다 불편함을 느낀다. 해외 축구 커뮤니티에는 정체불명 혹은 의미가 와전된 개념, 용어가 많아서 '크랙'도 그 중 하나라는 느낌이 강했다.
영어사전에서 찾아본 '크랙'의 정의 중엔 흔히 축구 커뮤니티에서 사용하는 개념은 없다.
게다가 영국 언론에서는 결코 '크랙'을 우리가 사용하는 식으로 적은 적이 없다. 다만 명사 6번에서 '일류의 사람, 제일인자'라고 하는 말이 그나마 가까운 말인 것 같다. 일각에선 크랙이 기본적으로는 갈라진 틈이라는 의미니까, '수비를 찢는 선수, 타이트한 수비를 돌파하여 붕괴시키는 선수'로 쓰게 되었다, 혹은 그렇게 쓸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단어의 의미를 그렇게 막 바꿔써도 되는 것일까? '크랙'이라는 말이 어떤 과정을 거쳐 축구계에서 사용되고 있는지 찾아보았다.
우선 커뮤니티에서 '크랙'이라는 말을 쓰는 게 언론의 영향인가 싶어 네이버에서 검색을 했다. 축구 기사에 '크랙'이라는 말을 쓴 건 얼마 되지 않는다. 대표적인 것을 보면,
스페인 일간지 <아스>는 이날 경기의 MVP 격인 `엘 크랙(El Crack)`으로 호비뉴를 선정했을 정도였다.<구자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139&aid=0000007744&
스페인 언론은 벌써 그[보얀]에게 ‘크랙’이라는 호칭을 붙여주고 있다. 경기를 아군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특별한 선수라는 의미다.
‘크랙(경기를 아군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특별한 선수)’이라는 호칭다운 플레이를 한 보얀을 앞세워 적지에서 귀중한 1승을 챙긴 바르셀로나는 홈에서 비기기만 해도 4강에 오른다.<위, 이거 전부 류형열 기자>
세르히오 가르시아는 바르셀로나 유스 소속으로 총 969골을 기록하며 바르셀로나의 미래를 이끌 '크랙'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후에 이 기록은 보얀에 의해 깨진다)<유형섭>
세 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된 걸 확인할 수 있다.
1) 경기 MVP인 '엘 크랙(스페인어이기 때문에 '크락'이 더 정확한 발음일 꺼다)'
2) 경기를 아군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특별한 선수
3) 팀의 중심 선수, 스타 선수
위에도 언급했지만 영국에서 축구 선수를 두고 '크랙'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의 기사들을 보며 축구 커뮤니티에서 통용되는 크랙의 의미는 스페인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라는, 특히 AS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는 강한 심증을 갖게 했다.
2006년 2월 tp에서 처음 '크랙'이라는 말이 등장한 글이다.
중요한 표현이 '크랙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어디에서 선정했건 해당 라운드의 최고 선수로 인정받았다는 의미다. '크랙'인 선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누가 매주 선정해준다는 의미다.
크랙이라는 말이 점점 사용되는 빈도가 높아지던 와중에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한다. 도대체 크랙, 크랙하는데 크랙이 뭔데? 이에 대해 tp의 rezah님은 이런 댓글을 달았다.
스페인 as 지에서 라리가 매경기 el crack, el dandy, vaya 어쩌고를 선정하는데
영어로하면 MOM 정도 되겠구요, 상황에 따라 대략 요즘 말하는 실바같은 경우엔
매치위너정도로 의미전달이 되겠네요.
영어로하면 MOM 정도 되겠구요, 상황에 따라 대략 요즘 말하는 실바같은 경우엔
매치위너정도로 의미전달이 되겠네요.
역시 '크랙'의 기원으로 AS가 지목되었다. 경기 MVP, Man of the match 정도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언급으로 '매치 위너(match winner)'가 있다.
영국 언론으로 돌아와보자. 아까 말한 대로 영국에서는 우리가 사용하는 크랙으로 명사 crack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crack의 변형인 cracking은 꽤 자주 사용되는 단어이다. 'cracking match' 또는 'cracking shot'이 하나의 관용구처럼 해설자들의 입이나 신문지상에 거론된다. cracking은 그 자체로 하나의 단어이기도 하다.
cracking (구어) 굉장히 좋은, 아주 멋진; 활발한, 빠른; 철저한, 맹렬한
그러니까 크래킹 매치, 샷에서 crack은 좋다, 멋지다, 빠르다 정도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crack은 왜 우리가 의미하는 것처럼 사용되지 않았나? 이건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 그들에겐 이미 그런 의미를 가진 단어가 많다. 대표적으로 rezah님이 언급한 '매치 위너'가 있고, 핵심 선수, 주요 선수라는 의미는 형용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오히려 영어권 단어로 보이는 '크랙'이 왜 스페인으로 가서 훌륭한 축구 선수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게 되었는가를 밝혀야 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터넷 사전을 찾아보니 스페인어에서 명사 crack은 AS 같은 스페인 언론이 사용하는 의미로 정의되어 있다.
1번 의미가 스타, 수퍼스타이다.
다른 사전에선 우수 선수, 스타 선수, 우승마, 마약을 의미.
영어권에서처럼 우승마, 마약의 의미를 간직하면서 뛰어난 운동 선수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문제는 스타 선수를 의미하지만 한국에서 사용하는 것처럼 '수비를 찢는' 둥 하는 구체적 설명은 없다는 것이다. '매치 위너'의 의미를 포함한다는 보장도 없다.
전에 자주 갔던 싸커라인에서 검색을 해보았다.
Crack(크락)
- 보통 우린 "크랙"이라고 불렀죠. 원래 영어로 "크랙"은 "갈라진 틈"이란 의미입니다. 하지만 축구에서 "크랙"은 다른 뜻으로 쓰여집니다. 마치 상대 수비라인을 갈라놓듯이(상대 수비라인에 "갈라진 틈"을 만들듯이) 골을 넣을 수 있는 선수,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단순히 골만 넣을 수 있는게 아니라 팀 전체의 우두머리 역할을 할 수 있는, 경기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선수를 "크랙"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크랙"이란 표현을 스페인 언론에서 가장 먼저 사용하신 분은 호세 마리아 밍게야라는 분이라고 합니다. UEFA 에이전트였고, 마라도나와 스토이치코프, 메시 등을 바르셀로나로 데려오신 분이라고 하는군요. 아래는 사진 설명입니다.
여기저기로 복사되어 퍼지는 글이라 원 출처는 모르겠다. 호세 마리아 밍게야라는 사람을 스페인어로 인터넷에서 검색해도 별로 나오는 것도 없고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 같다. 게다가 윗 문단의 설명은 스페인에서 쓰는 의미를 영어사전을 통해 이해하기 위해 쓸데없이 상상력을 부풀렸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는다. 리버풀에서 '크랙'이라며 원하고 외치는 발렌시아의 다비드 실바. 그가 팀 전체의 우두머리이고 경기를 이끌어가는 선수인가? 앞에서는 모세도 아닐텐데 수비를 가르며 골을 넣을 수 있는 선수라고 했다가, 뒤에선 골만 넣는 걸로 부족하다고 하니 축구의 신이라도 되어야 한다는 건가? 그런 기준에 맞는 선수는 도대체 누구인가?
싸커라인 게시판말고 필진이 번역한 카카의 인터뷰 기사를 보자.
리켈메는 Crack(크락: 스페인어권 국가에서 최우수 선수들을 일컫는 말)인가?
Crack은 보통 팀이 가장 필요할 때 적절하게 나타나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는 선수들에게 쓰는 말인데 리켈메는 분명 Crack이다. 그래서 나도 리켈메의 플레이 스타일을 매우 좋아한다.
어떤 기자의 질문에 카카가 답을 했다는 건데, 흥미롭게도 포르투갈어를 쓰는 브라질에 있다가 이탈리아에서 축구를 했던 카카가 2007년에 crack의 개념을 늘어놓으며 리켈메가 크랙이라고 하고 있다. 스페인뿐 아니라 포르투갈, 이탈리아에서도 사용된다는 말인가? 이건 시간 관계상 오늘 찾아보진 않겠지만 흥미로운 검색거리다. 하여간 기자의 질문 부분에서 싸커라인 필진이 적은 뜻풀이나 카카가 한 대답을 봐도 한국에서 쓰는 크랙의 의미는 와전된 것이 맞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지금까지 약간 믿을만한 출처들을 통해 판단해보면 '크랙'엔 두 가지가 있다. AS가 선정하는 이 주의 크락. 그리고 리켈메 같은 크랙. 하지만 이 글에 적지는 않았지만 몇 가지 스페인어 기사, 블로그를 보고 나니 '엘 크락'은 (수퍼) 스타 정도의 의미가 적당한 것 같다. 영어 상의 의미로도 그렇다. 또 공격 포지션의 선수들이 상대적으로 더 주목받고 더 많은 돈을 벌지만 반드시 크랙이 그런 선수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경기가 어렵더라도 상대의 철통같은 수비를 뚫고 득점을 하는 선수를 지칭하기 위한 용어를 원하는 건 당연한 심리인지 모른다. 하지만 수비를 뚫기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골키퍼가 신들렸을 수도 있고, 슛이 빗나가버릴 수도 있다. 스페인에서 시작된 축구 선수를 지칭하는 '크락' 개념을 이야기하면서 '찢는다, 찢어준다'는 의미를 자꾸 들여오려고 하는 점, 선수의 득점 능력에 대한 부분을 포함했다가 안 했다가 하는 점 등은 우리가 만들어서 우리끼리 쓰는 '크랙' 개념이 상당히 허약하다는 걸 보여준다. 외국어를 사용하려면 그 의미를 철저히 아는 게 우선임은 당연하고, 그걸 우리식으로 소화해 '외래어'로 쓰겠다고 해도 기원을 무시한 채 아무렇게나 섞어 쓰면 안 된다. 몇 년 전에는 앵커의 의미가 완전히 새롭게 창출되더니 이젠 크랙이다.
반응형
'리버풀 & 축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베니테스의 유벤투스 행 루머에 대해 (0) | 2010.01.29 |
---|---|
토니 바렛 웹챗: 리버풀 위기에 대해 (0) | 2010.01.15 |
늦어지는 박지성 재계약 (0) | 2009.07.08 |
같은 팀 축구 선수끼리 다툰 역사 (2) | 2009.05.18 |
잉글랜드 축구 자국선수 쿼터제 도입에 원칙적 합의 (0) | 2009.0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