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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31일, 리버풀과 첼시는 각각 앤디 캐롤과 페르난도 토레스를 영입하며 영국 축구 사상 최고의 이적료를 연이어 갱신했다. 정확히 일 년이 지난 어제도 1월 이적 시장의 마지막 날이었으나 전 해에 비해 지독히도 조용한 하루였다. 리버풀이 테베스 영입을 위해 캐롤도 내줄 수 있다는 비밀이 드러난 이후 테베스를 임대로라도 영입하겠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일 년 전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캐롤과 토레스의 이적 이야기를 정리해보려고 한다. 공교롭게도 두 선수 모두 새로운 팀에서 일 년 간 활약이 미미했다. 이전까지 그들의 모습에 비추어도 그렇고 그들에게 각기 새롭게 붙은 35m, 50m 파운드의 공격수라는 꼬리표 때문에 더욱 그들의 부진이 부각되었다. 팬들은 탄식을, 언론은 조롱하기에 바빴다. 심지어 이 두 선수는 이적한지 일 년도 되지 않아 다른 팀으로의 이적설에 시달려야했다. 이들에 대한 비판은 종종 사실에 근거하지 않거나, 그들에게 붙은 가격표에 기반하여 가혹하게 이루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이 일 년 전에 어떻게 이적을 하게 되었는가를 돌아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당시 상황을 텔레그라프, 더 타임스, 가디언, 인디펜던트 등 주요 언론의 보도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해보기로 한다. 언론사마다 내용이 조금씩 다른 경우가 있다. 이번에 정리하면서 나 자신도 몰랐거나 잘못 알고 있는 부분들이 좀 있다는 걸 확인했다.
Chelsea - October fixtures 2011 by The_Old_Grey_Wolf |
첼시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토레스를 자신의 선수로 점찍다
작년 1월의 미친 듯한 이적 시장이 끝난 이후 어떤 기사는 첼시 구단주 로만의 시혜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평했다. 로만은 토레스 영입을 위해 50m 파운드를, 다비드 루이즈 영입을 위해 20m 파운드 이상을 하루에 지출했다. 덕분에 뉴캐슬은 리버풀로부터 캐롤의 이적료로 35m 파운드를 받아낼 수 있었다. 로만은 왜 지난 1월에 토레스를 영입했나, 그리고 언제부터 토레스를 영입하려고 했나?
복수의 언론이 첼시가 2009-10 시즌 말부터 토레스에 대한 영입 제안을 했다고 말한다. 인디펜던트는 2010년 5월에 첼시가 이적료로 70m 파운드를 제시했다가 거절당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라파가 나중에 BBC에서 자신이 리버풀 감독으로 있을 때 70m 파운드의 이적료가 논의되었다고 말한 것과 일치한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이미 2010년 1월 피파 올해의 선수 시상식장에서 첼시 주장 존 테리가 토레스에게 첼시로 올 것을 권유한 것이 최초의 접촉이었다. 이 때 토레스는 간단히 거절했지만 팀이 리그 7위로 시즌을 끝내고 라파마저 경질된 이후 첼시의 제안에 솔깃해졌다.
2010년 여름에 첼시가 얼마를 제안했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더 타임스는 6월에 첼시가 25m 파운드의 제안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텔레그라프에서는 7월에 35m 파운드였다고 적는다. 나중에 첼시가 왜 토레스 영입을 위해 50m 파운드까지 냈는가를 이해하는데 있어 이전의 제시액이 유의미할 터인데 25m에서 70m 파운드까지 너무나 다른 수치들이 제시되어 어떤 것을 믿어야할지 모르겠다. 2010년 여름 첼시의 최초 제시액은 오리무중이다.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2011년 1월 토레스 영입을 직접 진두지휘했고 첼시는 그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리버풀은 토레스가 떠나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설득했지만 토레스는 서면으로 이적요청서를 내며 팀을 떠날 뜻을 확고히 했다. 그래서 리버풀은 첼시로부터 50m 파운드라는 영국 내 클럽간 이적료 최고액을 받아내는 쪽으로 선회했고, 그 대체자를 급히 물색했다. 그 대상은 그동안 리버풀 이적이 그다지 점쳐지지 않았던, 사실 어느 팀으로도 그 이적 시장에서 옮기지 않을 것 같았던 뉴캐슬의 앤디 캐롤이었다. 그러나 아래 쓰겠지만 캐롤이 처음부터 토레스의 대체자로 점지된 것은 아니었다.
로만은 왜 하필 작년 1월에 토레스 영입에 열을 올렸을까.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뉴스들에 나오는 이유는 대체로 일치한다. 우선 큰 틀에서 토레스 영입은 첼시의 훌륭하지만 노화된 스쿼드 혁신의 상징이자 신호탄이었다. 2010년 토레스에 대한 첼시의 접근이 비교적 언론의 조명을 덜 받은 것에 비해 2011년 1월 첼시의 접근은 매우 구체적이고 분명했으며, 아무리 로만이 리버풀이 요구하는 50m 파운드를 지불하기 꺼렸어도 기왕에 시작된 일을 그만 둘 수는 없었다. 첼시는 토레스를 영입함으로써 나이 많은 주전들을 교체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그리고 단기적으로 급한 일은 시즌 후반기 챔피언스 리그에서의 성적이었다. 로만이 첼시를 인수한 이후 많은 대회에서 우승했지만 챔피언스 리그 우승만은 아직 달성하지 못했기에 토레스 영입은 지난 시즌 챔스 우승을 위한 영입이기도 했다. 또 여름까지 기다릴 경우 맨체스터 시티나 바르셀로나 등과의 영입 경쟁이 일어나 첼시가 영입을 장담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다. 맨시티가 제코를 영입하며 토레스까지 데려올 여지가 없는 사이 첼시는 재빨리 움직여 토레스를 붙잡았다.
과거에 토레스가 좋은 선수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이미 2010년에 부상과 부진에 시달렸기에 50m 파운드에 걸맞는 선수인지, 로만이 자신의 돈을 올바로 쓰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작년 이적 당시에도 있었다. 현재까지는 로만의 판단이 그다지 현명하지는 않았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 같은데, 나이를 더 먹기 전에 빨리 우승할 수 있는 팀으로 가겠다던 토레스의 결정도 그 자신의 부진과 함께 탁월한 것은 아닌 것으로 판명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Andy Carroll And Didier Drogba by Steenbergs |
왜 리버풀은 캐롤을 영입했나? 혹은 수아레스 영입의 성격
대답은 간단하다. 리버풀은 팀의 9번 공격수인 토레스를 떠나보내야했고 그러므로 대체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앤디 캐롤이 되어야만 했던 것은 아니다. 어느 클럽이나 그렇지만 리버풀은 영입 대상 리스트가 있었고 캐롤이 아닌 다른 선수를 데려오려고 노력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리버풀은 그렇게 했다.
여기서 애매한 것이 수아레스의 영입의 성격이다. 리버풀은 작년 1월 토트넘과 수아레스 영입 경쟁을 펼쳤는데 두 팀 모두 남아공 월드컵 이후 수아레스를 주의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토트넘은 이미 2010년 여름에 영입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당시 아약스가 수아레스의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이유로 35m 파운드 가량을 요구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결국 리버풀이 수아레스를 긴 협상 끝에 영입하는 데 성공하는데 원래 수아레스는 페르난도 토레스의 짝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토레스가 이적할 뜻을 밝히며 그의 대체자 성격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작년 1월 16일자 썬데이 미러에 따르면 수아레스는 토레스와 에이전트를 공유하는 사이라서 토레스에게 리버풀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작년 7월 2일 인디펜던트에는 실제로 리버풀이 좋은 클럽이라는 토레스의 조언이 수아레스의 리버풀 이적에 기여를 했다는 수아레스 본인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이 기사에도 수아레스가 토레스의 파트너가 되길 기대하며 이적했다고 하는데 정작 자신은 리버풀을 떠날 예정이었던 토레스가 언제 그런 조언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토레스가 2010년 여름에 리버풀을 떠날 뜻이 있음을 분명히 밝힌 것은 리버풀 구단 관계자들에게 비밀이 아니었다. 토레스 에이전트는 그 여름에 토레스가 프리미어 리그에는 있을 텐데 그게 리버풀일지는 모르겠다는 발언을 할 정도였다. 새로 감독이 된 호지슨과 당시의 리버풀 MD(매니징 디렉터)인 퍼슬로우가 지금 리버풀이 매각 과정 중에 있으니 한 시즌만 기다려달라, 이번에도 챔피언스 리그 진출에 실패하면 50m 파운드를 제시하는 클럽에게 가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하며 간신히 그를 붙잡아 놓았다. 한편 더 타임스는 리버풀 인수 의사를 보인 그룹 중 하나인 케니 황 측이 토레스의 소원처럼 좋은 선수들을 많이 영입하겠다는 환상을 심어줘서 리버풀에 잔류했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즉 토레스가 2010년 이후 여름에 떠날 뜻을 분명히 했고, 실제 리버풀 매각 과정이 힘겹게 진행되며 팀의 성적도 곤두박질치며 다음 시즌 챔피언스 리그는 커녕 유로파 리그조차 진출이 불투명한 와중에 리버풀로서 토레스가 떠날 것을, 최소한 2011년 여름에는 이적할 것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대체자는 진작부터 물색되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수아레스를 2010년 여름부터 관찰한 것은 애초에 그가 장기적인 토레스의 대체자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물론 조 콜, 요바노비치 등 호지슨 감독 시기에 리버풀에 합류한 공격 선수들이 극도로 부진했기에 그 선수들의 대체자로서 영입되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수아레스는 최전방이라기보다 세컨드 스트라이커에 적합한 선수이므로 토레스와 정확한 1:1 대체 관계는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랜 설득이 실패하며 결국 토레스가 첼시로 가겠다고 결정된 순간 토레스의 대체자가 필요했다. 그 대상은 캐롤만은 아니었다. 스페인 클럽 빌바오의 요렌테, 세비야의 네그레도도 있었다. 그러나 이적 시장 마감을 3, 4일 남긴 상황에서 대체자를 외국 팀에서 데려오기엔 시간적 제약이 있었다. 캐롤은 정말 막판에 급부상한 카드였다. 그렇기 때문에 리버풀로서는 오버페이가 불가피했다. 앤디 캐롤은 뉴캐슬의 로컬 보이로 클럽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고, 클럽도 2011년 1월에 절대 캐롤을 팔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였다. 그런 선수를 데려오기 위해서는 터무니없는 액수가 필요했다. 첼시가 토레스 영입을 위해 어처구니 없는 돈을 투자했기에 캐롤 영입이 가능했다. 더구나 1월 이적시장은 오버페이가 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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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 전에는 어떤 공격수를 영입하려고 했는가. 뉴스들을 보면 이제는 아스날 선수가 된 10대 선수 옥슬레이드-체임벌린이 꽤 진지하게 논의되었고, 아스톤 빌라의 애슐리 영은 존 헨리 구단주가 빌라의 구단주인 러너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협상을 할 정도로 공을 들였던 케이스다. 하지만 리버풀을 떠나려는 토레스의 결의가 분명해진 이후 체임벌린 카드는 우선순위가 밀린 것으로 보인다. 시기적으로 애슐리 영은 토레스가 구두로 클럽에 이적 의사를 밝힌 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영입이 논의되기 시작했고, 실제 본격적인 협상은 1월 29일 정도에 이루어졌다. 아스톤 빌라는 계약이 18개월 남은 애슐리 영의 이적료로 최대 18m 파운드 정도를 요구했다는데 캐롤 이적료가 거의 두 배인 35m임을 감안하면 만약 영이 이때 영입되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아마 리버풀은 팀의 최고 선수이자 핵심 공격수를 뺏기며 별로 타격을 받지 않았다는 제스처를 취하기 위해서 정통 공격수 영입이 필요했고 그래서 최종적으로 영이 아닌 캐롤로 돌아선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공격 부문에서 애초의 영입 대상은 캐롤이 아니라 영이었다.
이 대목에서 당시 토트넘의 움직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데 다음 파트의 주제로 삼기로 하고 리버풀이 캐롤을 영국인 역대 최고의 몸값의 선수로 만든 이유를 정리하기로 하자. 토레스의 이적이 케니에게 의미했던 바는 앤디 캐롤의 이적이 뉴캐슬 감독 알란 파듀에게 의미했던 바와 유사하다. 각 클럽은 팀의 최고 공격수를 잃었다. 그리고 두 클럽 모두 절대 그 선수들을 팔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특히 양 클럽 모두 감독이 바뀐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 두 선수의 이적은 감독의 입지를 뒤흔들 수 있는 파괴력이 있었다. 당시 임시 감독이었던 케니 달글리쉬에 비해 파듀의 타격이 더 크긴 했다. 파듀는 감독이 될 때부터 캐롤을 절대 팔지 않는다는 클럽 수뇌부의 약속을 받아냈고, 1월 16일까지 수차례에 걸쳐 캐롤은 뉴캐슬에 머물 거라고 공언했다. 그런데 구단주 애슐리가 큰 돈에 욕심이 생겨 대체자도 없이 캐롤을 팔아치우자 상당히 입지가 흔들렸다. 케니 달글리쉬도 비록 임시 감독이었지만 감독이 되자마자 토레스가 떠나게 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2010년 10월에 리버풀의 새 주인이 된 FSG는 처음에는 1월 이적시장에서 별로 활동이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호지슨 재임 말기 리버풀이 블랙풀, 울브스와 같은 하위팀에 연거푸 패배하며 위기가 고조되자 케니를 새 감독으로 세우며 위기 타개에 나섰다. FSG가 이적 시장에서 활동이 없는 것은 이전 힉스, 질렛 체제에서 미국 구단주에 치를 떨던 리버풀의 스타 선수들에게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불안감을 키웠다. 특히 2010년 여름에 각기 일정 조건이 충족되면 시즌 말에 팀을 떠날 수 있다는 약속을 리버풀로부터 받아낸 토레스, 레이나 등이 그러했다. 일부 뉴스는 제라드도 흔들렸다고 주장했다. 수아레스 영입은 이런 불안감을 줄이기 위한 선언적 움직임이었으나 첼시로 가기로 마음먹은 토레스는 그것이 너무 늦은 조치라며 제 갈길을 갔다.
인수 이후 갓 리버풀을 운영하기 시작한 FSG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우선 팀의 단장이 필요했다. 비록 팀의 선수 영입을 총괄할 데미앙 코몰리가 있었지만 그외 업무를 처리할 인물이 없었다. 먼 옛날 리버풀이 구단주를 바꾸게 된 계기인 새로운 경기장 문제도 결정해야 했다. 경기장은 결정 사항에 따라 자금 운영 계획이 완전히 달라지는 문제였다. 더구나 1월에 호지슨이 해임되었고, 케니는 임시직이었을 뿐이다. 단기간 팀을 맡을 감독을 믿고 선수를 영입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케니가 임시로 맡았다고 해도 상징성 때문에 그는 리버풀에서 그냥 또 하나의 감독일 수 없었다. FSG는 단순히 팀내 핵심 공격수가 떠나게 되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 없기도 했다. 감독은 임시라도 코몰리는 장기적으로 팀에 있을 사람이므로 전반적인 선수 구성 문제는 감독과 별개로 결정될 수도 있었다. FSG는 이전 체제와 다른 책임있는 구단주라는 점을 팬들에게 어필할 필요가 있었다. 존 헨리와 코몰리는 모두 머니볼의 철학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젊고 발전 가능성이 있는 토레스의 대체자를 원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시간이 없어 요렌테 영입은 어려웠고, 영국 내에서 찾아야했다. 2010-11 시즌에 처음 프리미어 리그를 경험했지만 잉글랜드의 미래를 책임질 유망주 공격수로 보였던 앤디 캐롤이 눈에 들어온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리버풀 외에 토트넘과 첼시도 앤디 캐롤 영입을 고려하거나 추진했다. 그래서 리버풀은 누가 봐도 무모하게 많은 35m 파운드를 주고 캐롤을 영입했다.
아직 쓸 내용이 많으나 분량이 너무 많아 캐롤과 토레스의 이적료 책정 문제, 리버풀과 같은 공격수 영입을 위해 다퉜던 토트넘 이야기 등은 2편에서 쓰기로 한다.
2012/02/02 - 1년 전 토레스와 캐롤 이적 사가(saga) 돌아보기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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