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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orary

그랜 토리노

by wannabe풍류객 2009.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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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어렴풋하게 기억이 난다. 작년에 개봉한다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두 영화가 체인질링과 그랜 토리노였다는 것이. 체인질링이 이스트우드의 영화라는 걸 까맣게 잊은 채 그랜 토리노를 보고 왔다.

약간 흐리지만 걷기에 나쁘지 않은 날. 신림역에 새로 생긴 포도몰의 롯데시네마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늦을까봐 별로 구경을 못했지만 시설이 앞에 있는 프리머스보다는 확실히 좋아보인다. 사람도 별로 없는 적절한 감상 환경.



영화는 우울하게 시작하여 우울하게 끝난다. 죽음으로 시작하여 죽음으로 끝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즉 월트 코왈스키는 교회에서 아내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 하지만 아들들은 아버지를 싫어하고, 손자, 손녀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버르장머리없는 후손들을 보며 월트는 인상을 찌푸린다. 그렇다. 이 영화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갈등이 너무 뿌리깊게 내려 완전히 망가지기 일보 직전의 가족이다. 서로가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유일한 연결점이었던 월트의 부인의 죽음은 그래서 극도의 위기를 불러온다.

하지만 여기에 영화가 말하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이는 가족화된 국가 그러니까 미국의 이미지에 대한 것이다. 월트가 살던 동네는 원래 백인이 많았는데 지역 경제가 낙후되어서인지 이제 백인은 거의 없고 가난한 '외국인', '흑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그리고 월트의 옆집으로 '몽족'이라는 난생 처음 듣는 종류의 대가족이 이주한다. 즉 영화는 백인 주도의 미국이 다양한 인종, 민족의 유입을 받아들이고 소통하고 결국 새로운 하나의 민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는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월트 '코왈스키'는 폴란드계 이주민인데, 재미있게도 미국 군인으로 한국전쟁에 참여했고, 미국의 대표적 산업인 자동차 업계 그것도 '포드'사에서 일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위해, 태어난 나라 폴란드가 아닌 미국의 시민이 되기 위한 자격을 처절하게 쟁취한 인물이 월트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근본을 잊은 것일까, 아니면 자신은 백인 혹은 유럽에서 왔기 때문일까 옆집의 알 수 없는 몽족을 참을 수 없어했다. 이는 위기다. 바로 미국의 위기다. 이민으로 만들어진 나라. 인디언들을 몰살하고 세운 나라. 그들은 항상 외부인을 받아들이며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조금 더 일찍 와서 자리를 잡은 사람들을 쉽사리 텃세를 부린다. 미국만의 사정은 아니겠지만.

몽족이라는 설정이 참 재미있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중국 사람이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란다. 베트남 쪽에 살던 사람들인것 같은데, (미국의 적인) 베트남과 적대관계였기 때문에 미국으로 왔다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미국의 혈맹인 사람들이다. 미군 경력이 있는 월트가 쉽사리 같은 미국인으로 인정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었다. 아마도 이런 종류의 이주민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미국의 많은 백인들에게도 영화를 그나마 편하게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영화는 이 외에도 수많은 다중 정체성의 인간들을 배치한다. '이탈리아'인 이발사, '아일랜드'인 건축사무소 책임자. 결국 몽족이건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이건 인간적인 소통이 된다면 같이 못 살 것 없다. 월트도 옆집에서 몽족의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외계인 같았던 그들을 이해하게 된다. 반복하지만 이는 미국의 운명이기도 하고, 어쩔 수 없는 경향처럼 보이는 글로벌화의 환경에 처한 세계 모든 국가의 문제이자 숙제이기도 하다.

결국 화해하며 잘 살고 해피 엔딩!이라면 재미가 없을테니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첨예한 갈등 요소를 불어넣는다. 바로 갱들이다. 그것도 하필 몽족 갱, '몽갱'이다. 옆집 몽족 소년과 소녀는 월트의 친구가 되지만 몽갱들은 소년과 소녀를 끝없이 괴롭힌다. 몽갱의 리더가 친척임에도. 이 해악, 미국의 안전과 사회통합을 해치는 몽갱이라는 해충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가 최종 목표가 된다. 아쉽게도 경찰들은 갱들을 처단하지 못하고 있다. 치고 빠지고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갱들의 범죄 행위를 입증할 결정적 근거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찌 할 것인가. 영화는 친절하게도 월트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설정을 제시한다. 그렇게 되어 아주 적절한 해결방법이 결말에 제시된다. 월트가 죽을 때 십자가 모양을 만들며 누웠다. 그는 사회의 해악을 없애고, 불쌍한 옆집 몽족을 구원하고, (아내의 유언대로) 신부에게 고해성사까지 마친 성자이다.

엔딩 크레딧에 흘러나오는 음악은 그랜 토리노. 월트가 포드에 있을 때 직접 만들었다는, 수십년이 지나도 깨끗하고 잘 굴러가는, 옆집 소년에게 물려준 그랜 토리노. 늙고 탁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젊은 시절 웨스턴 무비에서 총질을 그렇게 잘 하던 그가 이 영화에선 갱단의 총세례를 받고 죽는다. 이것도 하나의 속죄일까. 이 늙은 배우 겸 감독의 말년의 열정은 꽤 박수를 보낼만하지만 최근 그의 영화들은 미국의 치부를 드러내는 듯 하면서 결국 급하게 봉합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좋은 감독이지만 위대하다고 하기는 망설여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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