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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죽음은 조금이나마 슬픔이 배어있다. 단지 소 한마리가 묻혔을 뿐인데 나는 극장에서 수년 만에 눈물을 흘렸다. 온갖 의문을 품으며 내 마음에 방어막을 쳤는데도.
처음에 '워낭소리'라는 제목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단순한 호기심이 생겼지만 굳이 보고 싶지는 않았다. 애당초 다큐멘터리인지도 몰랐고, 어디서 할아버지 한 분을 잘 설득해서 연기를 잘 시켰나싶어 값싼 향수를 자극하는 영화일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영화는 호평에 호평을 거듭해 극장 상영관을 늘려갔다. 포탈에서 본 영화에 대한 논평이 결정적으로 워낭소리가 볼만한 영화라는 확신을 심어줬다. 소의 해, 느림의 미학, 고기값으로 가격이 매겨지는 현재의 소.
씨네큐브가 가득차는 생경한 장면을 목격하며 상영관에 들어섰다. 가족단위로 많이 오고, 나이가 지긋한 분들도 많다. 애들도 많아 뒷자리에 앉은 녀석은 상영 중에 내 자리를 발로 몇 번 차기도 했다. CGV, 메가박스, 씨너스, 롯데시네마 등에서 광고를 5분 이상 보는 것이 당연해질 정도로 봐서일까 씨네큐브에 처음 온 것도 아닌데 갑자기 불이 꺼지며 영화가 시작되니 어색했다.
절에 올라 소를 추모하는 노부부. 그 높은 계단을 그 연약한 다리로 어떻게 오르셨는지. 영화가 진행되며 영화에 대해 의아함이 커졌다. 나중에 씨네큐브 안에 마련된 게시판의 글들 속에서 지적하는 영화의 문제점들과 공통되는 부분들이기도 하다. 이건 픽션인가 진짜 있던 일인가? 가장 의심을 품게 된 것은 시장 앞에서 미국 소의 수입에 반대하는 시위 장면이다. 아무래도 작년 일이 생각날 뿐이었다. 2005, 6년에도 그런 일이 있었던가 싶었다. 암송아지값이 200만원이 넘는 걸 보면 또 요즘 일은 아닌 것 같고. 뭔가 뒤죽박죽인 것 같았다. 게다가 그다지 생으로 찍은 것 같지가 않다. 즉 감독의 편집이 좀 지나치게 보여서 픽션의 느낌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영화 중반 쯤엔 픽션으로 거의 단정짓게 되었다. 하지만 혼란스럽게도 화면 속의 할아버지를 아무리 봐도 연기를 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 "소 팔아!", "아이 아파"가 아니었을까. 영화 내내 할머니는 궁시렁거리셨고, 할아버지는 귀를 닫았다. 자기가 소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살았다는 할머니의 신세 한탄. 8살 때부터 불편해진 할아버지의 다리는 너무나 가늘어서 할아버지가 하는 모든 농사일, 집안일이 초인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 다리와 죽을 때가 다 된 40살 먹은 늙은 소는 합작해서 9명의 자녀를 길러냈다. 물론 할머니도 많은 일을 하셨을 거다.
뭔가 뒤죽박죽이다. 작가 김연수씨처럼 할아버지, 할머니가 쓴 농약회사 모자를 통해 가자 지구 이야기까지 재치있게 잡아낼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는 아니 이 사건은 객관적으로 바라보기가 힘들어진다.
노부부는 왜 그렇게 죽도록 일만 할까. 고생고생하여 지은 농사의 대부분은 자녀들에게 전달된다. 그들이 쌀 사먹을 돈이 없도록 힘들지도 안을텐데. 아마 별다른 선택지가 없긴 할 것이다. 하던 일, 잘 해 오던 일, 당연히 하는 일을 할 뿐. 머리가 아파도, 발가락 뼈가 망가져도, 소가 아파도, 죽을 때까지 순리라고 생각하는 일을 그냥 하는 거다. 추석에 모인 자녀들이 돈을 각출해 부모님 생활비를 드린다는 말이 나오지만 도시도 아닌 농촌에서 그런 생활을 한다는 건 무리다. 농촌에서 내 땅(게다가 할아버지는 오랜 세월 남의 집 머슴살이도 했으니)을 그냥 놀게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죽어도 밭에서 죽겠다던 할아버지의 말이 모든 걸 말한다. 소가 죽을 것을 대비해 암소 한 마리를 사왔지만 일소가 아니라 길들여지지도 않았다.
나도 오랫동안 농촌에서 살았지만 소를 교통수단으로 이용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아주 생경하다. 80년대에 이미 너도나도 경운기를 타고 다녔고, 온갖 농기계로 고수익을 올리기 위해 혈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봐서 시대의 흐름은 거스를 수가 없다. 거스르려 하면 도태되고 만다. 아마 더 이상 소로 농사를 짓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소는 미국소, 호주소, 한우 등으로 나뉘어 맛있는 소고기로서의 품질만 따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글에선가 소값(정확히는 한우값)이 떨어진다며 미국소의 수입을 반대하는 한국 농민의 모습도 할아버지와 소에게는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광경일 뿐임을 지적한 것이 날카롭게 느껴졌다. 한국 축산 농가에는 생계가 걸린 문제이고, 동력원으로써 소의 경제적 가치가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인정할 수는 있다. 그래도 수십 년 전의 유물 같은 할아버지와 소의 모습은 우리가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것,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갑자기 환기시킨다. 종의 차이를 뛰어넘어 교감하며 공존하는 삶. 우리 삶이 아무리 기계 문명으로 편리해진다고 해도 기계와 교감하기는 쉽지 않다. 기계(인공지능을 가졌더라도)는 대개 영화 속에서 사람과 대립하며 사람을 무참히 짓밟는 존재로 묘사되고 실제로도 그런 것 같다. 아니 기계화된 삶은 우리네 사람마저도 기계, 부속품으로 전락시킨다. 몸값, 스펙, 키, 얼굴 등으로 등급이 매겨져서 시장에 내다팔리는.
늙디늙은 경상도 남자가 속내를 잘 밝히지는 않을 거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자기가 정신을 잃고 자도 혼자서 집으로 돌아온 소가 신통했고, 30년간 애써준 소가 죽음을 앞뒀을 때 선선히 고삐와 코뚜레를 풀어줬다. 그리고 워낭을 무심히 흔들어볼 뿐이다. 아마 생에 대한 아쉬움은 없으실 것이다. 변한 세상에 대한 걱정은 많으시겠지. 영화의 성공으로 많은 사람들이 마을로 찾아가 할아버지를 귀찮게 한단다. 어쩌려고? 미디어의 폐해다. 일소라도 하나 사드릴 건가? 끝까지 정리가 잘 되지 않지만 오늘은 이만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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