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김세윤의 영화음악 에피소드들을 뒤늦게 듣다가 애프터썬이라는 작품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런 영화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워낙 여유가 없어서 안 봤던 작품 중 하나였는데, 워낙 극찬을 하길래 게다가 아빠 역의 배우가 노멀 피플의 남자 주인공이었다는 걸 알게 되어 갑자기 봤다.
역시나 여유가 없어서 온전히 집중하며 보지는 못했고, 영화가 끝나자 이게 무슨 이야긴가 싶어졌다. 습관처럼 주요 매체들의 리뷰들을 몇 개 읽었고, 거의 극찬 일색이었으나 내용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없었다. 이 영화는 스토리보다는 영화를 봄으로써 얻는 느낌이 중요한 종류였다는 결론을 얻었다.
주인공인 10살 정도의 딸이 부모의 이혼으로 같이 살지 않는 아빠와 오래간만에 만나 터키로 며칠 여행을 떠났고, 아빠는 30살 정도의 젊은 아빠라 오빠로 오해를 사기도 하는 사람이고, 주인공은 나중에 커서 동성 파트너와 사는 등의 줄기가 있다.
딸은 여행을 가서 만난 낯선 젊은 언니, 오빠 커플들이 사랑하는 모습을 본다. 때로는 동성 커플의 사랑도 목격하며 이게 자신의 성인 시절의 사랑과 모종의 연관이 있는 듯 그려진다. 그런데 아빠는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딸이 자거나 없을 때 괴로워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딸과 있을 때 장면을 보면 아빠가 우울증에 빠진 사람은 아닌 듯 했다. 오히려 농담을 던지고 같이 장난치는 걸 좋아했다. 이혼하여 같이 안 사는 딸에게 양육비를 얼마나 주어야 하는지 등이 내용이 나온 것 같지도 않다.
김세윤 작가는 아이들은 모르는 부모들의 괴로움에 대해 언급했던 것 같다.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아주 가끔 아버지가 매우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 고민하신 기억이 있지만 극히 드문 경우다. 나는 아버지의 온갖 괴로움을 거의 모른다. 어머니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 영화 속 젊은 아버지의 장면이 주인공 딸의 기억이라면 심하다 싶을 정도로 아버지의 고통이 자주 등장한다. 어떤 장면은 딸이 목격할리가 없는 내용도 있다.
약간 답답한 마음에 레딧의 관련 글들을 보았다. 구글에 aftersun을 입력하면 연관 검색어로 아빠의 자살 이야기가 나온다. 실제로 이 영화는 감독인 샬럿 웰스의 경험을 녹였되 그대로 보여준 이야기는 아니라고 하는데, 그럼에도 감독의 10대 시절 아버지는 자살했다고 한다.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은 감독의 경험을 모르고도 영화 속 아빠가 자살했다고 느꼈다.
영화 속 아빠가 자살했다는 영화 밖 '사실'을 알게 되면 영화가 훨씬 명료하고 더 슬프게 다가온다. 아까는 우울증 증세를 감지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다른 이들은 우울증의 증세들이 많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이혼 후 아빠는 애인이 있었지만 헤어졌고,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카페를 운영한 듯 했지만 망했고, 다음 일은 아직 찾지 못했다. 아빠는 종종 정신을 잃은 듯 잠든 장면이 많았다. 딸이 스코틀랜드에 살고 있지만 근처에 살 생각은 없고, 런던에서 살며 딸을 위한 방을 만들어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비싼 양탄자를 무리해서 샀고, 5만 리라짜리 즉석 사진을 거침없이 찍었다. 딸에게 줄 엽서에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을 썼다.
가상의 춤 장면에서 배경 음악으로 퀸의 '언더 프레셔'가 사용되었고, 가사 중에는 이게 우리의 마지막 춤이라는 부분까지 있어서 아빠의 운명을 암시하고, 적어도 둘이 만나는 게 마지막이라는 걸 알려준다. 딸은 여행지에서 높은 곳에 혼자 올라간 아빠를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는데, 아빠의 표정은 쑥스러움도 기쁨도 아닌 당황스러움에 가까웠다. 태어난 날을 딸과 낯선 이들이 축하해주는데 그는 죽음(의 결심)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영화를 처음 보며 분명히 고민하던 아빠가 양탄자를 산 걸 봤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백팩만 메고 가길래 어디에 둔 건가 싶었는데, 다른 사람의 언급을 보고 영화를 되돌려보며 성인이 된 소피의 방 바닥에 그 양탄자가 깔린 유일한 장면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종류의 영화를 딴 일을 하며 봤다는 게 아쉽고도 한심하게 느껴진다.
https://www.reddit.com/r/movies/comments/yywo0n/aftersun_interpretation_spoilers/
https://www.reddit.com/r/TIFF/comments/xe20mj/aftersun_qa/
https://www.reddit.com/r/TIFF/comments/xjiw72/thoughts_on_aftersun/
밥먹다 생각난 점 추가. 캠코더에 저장된 영상 중 하나는 딸이 자기는 11살이 될 거고, 아버지는 이제 130살에서 131살이 될 거라는 농담이다. 아빠의 실제 나이에 100살을 더한 거다. 하지만 만약 아빠가 빠르게는 딸과의 여행 직후, 더 늦어도 몇 년 내에 자살을 했다면 얼마나 지독한 역설이었을까. 이 젋은 아빠는 40 혹은 30대 중반조차 넘기지 못하게 되니. 아내와는 이혼했다고 하더라도 딸과의 관계가 남았는데 딸을 사랑함에도 목숨을 끊은 심정은 어떠했을까.
딸은 아빠가 공중전화로 엄마와 통화하며 사랑한다고 한 말을 마음에 두었다. 부모가 다시 결합하려나하는 기대, 자기가 7살 때 착각으로 인해 했던 기대를 다시 되살린 것이다. 하지만 그 장면에서 아빠는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부러진 팔을 감싼 기브스를 혼자 작은 가위로 잘라내는 중이었고, 그 와중에 다치며 육신의 고통으로 힘들어했다. 팔이 아픈 것보다 딸의 바람을 이룰 수 없다는 점이 더 힘들었을지 모른다.
화면에서 캐릭터들의 배경으로 하늘에서 패러글라이딩하는 사람들이 여러 차례 잡힌다. 딸은 하고 싶어했지만 어려서 안 된다는 말을 들었던 듯 하다. 후반부에 오래된 계단식 야외극장(?)에 홀로 올라간 아빠의 이미지가 함께 떠오른다. 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인 패러글라이딩, 높은 곳에 올라가지만 날개가 없어 더 이상 높이 갈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함. 안전장비를 통해 하늘에서 추락하지 않을 수 있는 패러글라이딩, 눈앞에 계단이 있으나 마음 속의 계단은 바닥을 모르는 심연. 혹은 단순히 아빠는 패러글라이딩 비용을 낼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10, 11세 아이가 하기에 패러글라이딩이 위험한 것도 사실이라 나이 제한이 정말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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