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시로’에 이어 ‘그 후’를 다 읽었다. 생각해보니 작가의 말에도 나오지만 산시로의 후속 같은 느낌이 있다. 주인공들의 이름이 다르고 세부적이 내용은 다르지만 학생 시절에 좋아하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 이후의 이야기이니 산시로와 이어지는 느낌이 있다. 다만 산시로의 경우는 고향의 부모로부터 경제적으로 크게 기댈 수 없는 반면 다이스케는 아버지의 경제력 덕분에 미치요를 붙잡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소설 말미에 드러나는 바 그는 미치요를 좋아하던 친구 히라오카와의 우정을 중시하다가 자신의 사랑을 양보 혹은 포기했다. 근본적으로는 좋아하는 여성에게 좋아한다는 말도 못 하고 있었고, 그저 관계 속에서 둘이 암묵적으로 서로를 사랑한다고 인식하는 와중이었다. 물론 소설의 전개 과정에서 다이스케와 미치요는 원래 몇 년 전에도 서로 좋아했음을 확인하지만, 애초에 둘이 그런 감정을 말로써 분명히 해두지 않았던 것이 문제이 근원이었다. 다이스케의 시점의 소설이니 그의 잘못이 두드러지나 미치요도 몇 년 전에 다이스케가 권한다고 좋아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했다는 게 지금의 상식으론 이해가 안 된다. 적어도 다이스케가 자신과 결혼하기는 싫은 모양이구나 생각했을 수는 있겠다. 더구나 기댈 곳이 없는 미치요로서는 누구건 자신과 결혼하겠다는 남성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보통 젊은 시절의 연애는 한 쪽의 결혼으로 인해 끝나고 만다. 그러나 히라오카가 취직한 회사에서 쫓겨나고, 그의 아기가 죽으며 도쿄에서 옛 인연들은 재회하고 여러 상황은 다이스케를 미치요를 향한 미친 사랑으로 내몰고 그 결과 다이스케는 가족과 친구로부터 절교를 당하며 극한 상황에 처한다. 다이스케는 인간적 관계의 단절 못지 않게 경제적 자립에 대한 두려움으로 절망한다. 그는 그 자신의 좋은 이유로 직업을 갖지 않고 사업하는 아버지의 용돈을 받아서 서른까지 살아왔기 때문이다.
'산시로'처럼 '그 후'에도 부모님이 주선한 결혼 상대가 등장한다. 산시로에서는 그녀의 존재가 편지를 통해 전해지지만 그 후의 혼기가 꽉 찬 다이스케에게는 실물로 다가온다. 다이스케는 그녀의 외모가 싫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에 대한 반감에 더해 나중에 노골적으로 드러난 결혼의 정략적 성격에 질색한다. 무엇보다 미치요에 대한 사랑이 다른 혼담을 거절하는 이유였다. 미치요도 물었다. 왜 결혼을 하지 않았냐고. 그 이유가 명확히 드러나진 않았지만 다이스케는 결국 미치요에 대한 생각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 후'에도 당시의 고급 지식에 해당할 용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사실 지금이라도 어지간한 사람들은 모를 내용들이 다수다. 소세키가 지식인으로서 자연스럽게 쓴 건지 아니면 과시하기 위해 쓴 건지는 모르겠다. 나로서는 후자에 가깝다고 혐의를 두게 된다. 산시로에서 굳이 스트레이 쉽을 여러 번 쓴 건 과하게 보였다. 하지만 영어로 대표되는 서구의 언어들이 소세키의 소설에 두드러진 건 서구적 근대화로 질주한 당시 일본의 실상을 잘 대변한다고 볼 수도 있다. 무엇이 중요한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 한 채 이런저런 서구 지식들을 잡다하게 먹어치우는.
러일전쟁은 크게 두드러지는 소설의 시대 배경이었고, 신문사라는 기업, 기자라는 직업, 주식 매매로 인한 몰락 등은 1909년이라는 소설의 연재 시기를 생각하면 당시 멸망 직전의 대한제국과 꽤 대조적이다. 대한제국에도 신문과 기자가 있었고, 기업도 있었지만 그(것)들의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 자료는 본 적이 없다. 남녀의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도 넌 이제 나랑 영어로 수작하자는 구한말 신소설의 연애 장면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느껴진다.
'그 후'에서 두드러지게 많이 나온 표현은 "묘한"이었다. 산시로에서도 있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적어도 그 후에는 묘하다는 수식어나 서술어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근래의 일본 드라마에서는 '미묘'라는 표현을 종종 접하긴 했다. 왜 다이스케는 묘하게 느낀 상황이 많았는지 잘 이해되진 않는다.
이 소설은 노동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런 글을 인터넷에서 찾을 수도 있었다. 그 글쓴이는 반자본주의적인 대표 캐릭터를 여기서 발견한 것이다. 여기에 대한 나의 생각은 유동적이라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진 않지만 다이스케의 경우는 매우 위태로운 경제관을 가진 게 사실이다. 자신의 경제력의 원천인 아버지의 회사가 부정한 방법을 써서 곧 망할 수도 있는데 태평했다. 오직 경제적 지원이 끊긴 후 미치요를 데리고 살 상황이 닥치자 극도의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사실 다이스케는 미치요를 친구에게 결혼시킨 이후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였는지 모르겠다.
소설에서 다이스케의 권태가 두드러지는데 그런 모습은 일제 시기 한국 소설들에 나타난 지식인들의 원형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령 이상의 날개 같은. 여기저기 배회하는 모습은 구보씨를 떠올리게도 한다. 다이스케는 일종의 정신 질환을 가지게 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3부작으로 일컬어지는 '문'이 남았는데 여기는 초반부터 아내가 등장한다. 앞선 두 작품의 주인공 같은 남자가 결혼하면 어떻게 살까를 탐구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