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시간'은 배우 정진영의 감독 데뷔작이라는 칭호가 가장 대표적일 영화다. 매우 한정된 장소와 적은 캐릭터들로 이루어진 이야기는 다소 급작스럽게 끝났고, 많은 관객들이 영화를 본 내 시간이 사라졌다는 불만을 드러냈다.
참 좋다로 끝난 영화의 결말은 뭐가 좋다는 건지 의문을 남긴다. 이 영화를 잘 해석했다는 리뷰를 쓰기는 힘들 듯 하고 영화에서 눈에 띈 점, 떠오르는 점들을 두서없이 써봐야겠다.
영화의 시작과 결말은 같은 장면이다. 조진웅이 작은 도시(?)를 혼자 걷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이다. 하지만 시작부에서는 흑백이었던 화면이 결말에는 컬러로 나타난다. 흑백이 과거의 회상 장면을 처리할 때 많이 사용되는 걸 생각하면 영화 시작부와 이어진 '사라진 시간' 부분이 과거라는 걸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영화는 시간 순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전반부와 후반부의 전후가 맞지 않는 내용들이 많아 이것이 과연 시간순의 배열인지 의심스럽다.
혹은 영화가 한 바퀴를 돌아서 순환되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는 것일까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말그대로 수미쌍관이고, 전반부와 후반부가 뒤섞인 이야기라서 전후반을 다 봐야 이야기가 될 듯 하면서도 결국은 어긋나는 스토리로 보인다.
비영화 커뮤니티에서 감상평들을 봤는데 영화 전반부 부부의 어설픈 연기를 두고 전반부를 꿈으로 보는 의견이 몇 개 보였다. 하지만 이상하기로 치면 후반부가 더 이상하다. 무엇보다도 진규 아버지를 살해하는데(했다고 생각하는데) 돼지?인가가 죽어있을 뿐인 장면이 가장 이상하다.
진규 아버지의 동창인 정신과 의사의 말이 어떤 핵심을 드러내고 있을 것이다. 꿈과 상상이 머릿속 쓰레기? 찌꺼기?의 소각이라고 했다. 그 의사는 소각을 강조했는데, 영화에서는 전반부의 주요 내용이 소각으로 종결되었고, 후반부에서도 비닐하우스 소각이 있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전반부가 꿈이거나 상상이고, 진규 아버지 살해 장면도 꿈, 상상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점을 생각하더라도 후반부가 완전히 납득이 가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형사시절 부인의 이름이 전지현이고, 아들 둘의 이름이 박지성, 박주영이라는 부분이 그렇다. 만약 후반부가 현실에 기반을 둔 곳이고, 박형구가 제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이름의 아내와 아들을 둔 적이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후반부의 박형구도 온전한 상태는 아니다. 초희 선생님과 공감하는 장면에서 나타나는 것을 보면 박형구 자신이 신내림을 받은 사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전반부의 부부 캐릭터는 사실상 후반부 박형구의 분열된 자아들로 보인다. 초등학교 선생님이면서 낮에 수업이 끝나면 초희 선생님이 운영하는 인형 만들기 교실에 참석하고, 밤만 되면 죽은 유명인의 혼령이 들어와 딴 사람이 되는 것이 박형구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럴 경우 어떻게 형사 시절의 아내였던 여성을 만나기도 전에 얼굴을 알았느냐가 문제적이다. 꿈에서 아직 만나보지 못한 사람을 보았다? 형사 시절 전화번호도 그렇다. 선생 박형구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15년 전부터 그 번호를 썼지만, 이상하게도 실제로는 초희 선생님이 2년 전까지 썼던 번호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2년 전은 초희가 형구를 만나기 전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박형구는 그 번호를 보고서 전화기의 번호를 눌렀지 그 번호를 외우지는 못 했다.
초희와의 관계도 이상하다. 형구로서는 초희를 몰라야할텐데, 오랜만에 만나 반갑다고 인사하는 초희를 알아보는 듯 했다. 초희가 이상한 점 투성이인 형구를 자꾸 따라다니는 것도 납득은 되지 않았다. 둘의 관계를 보면 예전에 서로에게 관심이 있었는데 형구가 안 나오게 되며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지는 것 같다. 서로 잘 모르는 사이답지 않게 초희는 형구와 함께 온천에 들어가기도 하고, 형구의 집에 가서 밥을 먹는다. 초희의 고백을 듣자면 초희가 전반부의 아내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시간 흐름이 이상해보이고, 순환구조의 서사인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진규라는 아이도 무언가 있어보인다. 이름부터 정진규라서 감독 이름과 매우 유사하다. 이름 문제가 나와서 그런데 엔딩 크레딧을 보면 전지현, 박지성, 박주영과 이름을 가진 스태프들이 많아 재미있었다. 초반부에 진규가 선생님과 대화할 때 카메라는 정진규라는 이름이 적힌 사물함을 클로즈업하기 때문에 이 이름에, 혹은 그 아이가 무언가 중요한 장치라는 각인을 시켜주는 것 같았다. 이 아이가 나중에 갑자기 조진웅이 되는 것일까 상상도 해보았다. 왜냐하면 초반 거의 30분이 되도록 조진웅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았고, 드러나는 진규의 비밀은 동남아 출신으로 보이는 어머니가 있다는 점 정도다. 그런데 그렇다면 진규 아버지가 서장 부인과 바람이 났다는 것이 계급적인 차원에서는 잘 맞지 않는다.
영화는 도플갱어나 분열된 자아를 다룬 데이빗 린치의 작품들을 연상시키는 점이 있고, 꿈과 보이지 않는 아이 얼굴이라는 점에서 인셉션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방송에서 감독 자신의 말이었는지 평론가의 말인지 헛갈리지만 배우가 겪는 혼란에 대한 영화라는 설명을 듣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매일 밤 다른 유명인의 영혼이 내 몸 속에 들어온다는 설정은 작품마다 다른 캐릭터를 연기해야하는 배우의 삶을 분명히 연상시킨다. 배우들은 이전의 다른 캐릭터들에 대한 기억을 소각해야할 것이지만, 때로는 소각이 잘 되지 않아 혼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일상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배우의 혼란이라는 점은 영화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주지만 왜 일반인들이 배우의 정체성 혼란에 대한 영화를 보야하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감독 정진영으로서는 자신과 동료들의 배우로서의 체험을 작품으로 만들고 싶었을지 몰라도, 그 외부의 사람들이 크게 관심을 가질 주제는 아닐 것이다. 작품에 대한 혹평과 흥행 실패도 결국 그런 차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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