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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Day 1: 길고 긴 하루

by wannabe풍류객 2009.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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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4년 만에 생애 두번째, 그리고 혼자 가는 여행의 시작이 순탄치는 않았다. 그 우여곡절의 시작은 출발일인 5월 27일 당일 아침에 인천공항에서 적은 바가 있으니 생략한다. 여하간 어렵지 않게 탑승 게이트에 가서 아침 뉴스를 보며 시간을 죽이다가 재빠르게 줄을 서서 비행기 안에 들어갔다.


어깨에 멘 가방 말고 작은 종이 가방에 몇 가지를 넣어 갔다. 론리 플래닛의 스페인 여행 책자, 조카가 친구한테 선물한다는 연필깎이, 바르셀로나에 계신 친지에게 드릴 말보로 한 갑 그리고 필기구 등이 들어있다.


비행기엔 한국 사람 외에 서양인들, 일본인들도 여럿 탔는데 자리는 많이 남았다. 그래서 내 옆 자리는 비어 있었다.



어디 쯤 날고 있을 때일까? 비행기의 유리창은 바깥이 찬 기온 때문에 성에가 생겼다. 여러 번 시도했지만 날개 쪽 좌석이라 비행기 바깥 풍경을 멋지게 잡는 데 실패했다.

비행기는 예정대로 암스테르담에서 1시간 조금 넘게 쉰 후 마드리드로 갔다. 내 좌석 근처에 연세가 있는 비구니들이 여럿 계셨는데 암스테르담에서 내리셨다.

비행기가 암스테르담에 서자 모든 승객이 짐을 갖고 내린다. 마드리드로 가기 위해 다시 타는 사람에게는 왼쪽과 같은 카드를 준다. 

창 밖으로 별다른 풍경도 보이지 않는 그 공항에서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한 명의 한국 여성이 내가 한국인인지 확인하고 나의 여행책자를 빌려서 뭔가 중요한 것을 발견하는 표정을 지은 후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지루하고 지루했던 14시간 이상이 지난 후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 처음 탑승할 때 집어든 신문 속의 스도쿠가 아니었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전에도 그런 것 같은데 잠은 잘 오지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스도쿠를 중간쯤 풀었을 때 틀린 것을 확인하고 다시 하느라 2~3시간을 한 문제로 보낸 것 같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이기도 했지만.

여차저차 도착한 마드리드.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높은 산이 없는 것이 특이했다. 문득 이런 곳에서의 전쟁은 산악 지형과 완전히 달랐겠구나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비행기에서 내려서 수하물 찾는 곳까지는 꽤 긴 거리다. 나 혼자 갔으면 헤맸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앞에 가는 사람들이 당연히(!) 있어서 따라갔는데 일찍 간 보람도 없이 한참 뒤에야 내 짐이 나왔다. 대한항공 편에서 내린 것을 확인한 공항 직원이 어느 쪽으로 나가라고 가르쳐줬고, 나가자마자 형과 형수님이 보였다. 안도했다.


이곳이 형이 일년 동안 살았던 집이다. 2-A에 사는데 집이 꽤 괜찮아보였다. 샤워를 하고, 집 안에서 신발을 계속 신어야 하는 어색함에 익숙해지려 노력하고, 거기 기준으론 이른 저녁을 먹고, 상그리아, 마오우 등을 마시며, 하몬을 씹으며, 오렌지를 먹으며, 세레사를 먹으며, TV에서 나오는 스페인어 해설을 들으며 챔피언스 리그 결승을 보았다. 여행의 피로가 몰려와 계속 졸았지만 에토의 멋진 수비 제끼기와 믿기 어려운 메시의 헤딩으로 바르샤가 우승을 차지하는 것을 보았다. 마드리드라 바르샤의 우승으로 동네가 떠들썩하지는 않았지만 조카의 말에 따르면 윗집 사람들이 환호했다고 한다. 다음 날 거리에 나가보니 바르샤 셔츠를 입고 다니는 사람을 적잖이 볼 수 있었다. 그 정도는 당연히 용서가 되는 것이었을까? 여하튼 해가 긴 스페인에서, 9시가 넘어도 해가 뜬 그 곳에서 잠이 들었다. 거의 24시간을 잠도 제대로 자지 못 하고 깨어있었던 길고 긴 5월 27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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