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페인

스페인의 개들

by wannabe풍류객 2009. 6. 6.
반응형
스페인에 와서 인상적인 것 중 하나는 개들이다. 키우는 개의 종류가 다양한지는 모르겠으나(우리나라야말로 온갖 개들이 다 있으니), 길거리에서 개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의 풍경을 아주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스페인의 개와 마주친 것은 스페인에 온 다음 날 마드리드의 한 학교 근처였다. 조카가 다니는 학교 옆의 한 주택에 큰 개 두 마리가 산다. 형수님은 그 중 한 마리를 된장이라고 부른다. 된장의 첫 인상은 아주 무섭다. 셰퍼드와 비슷한 몸매를 가진 개인데 눈 색깔이 독특했다. 무섭게 생긴 큰 개가 형수님을 보니 꼬리를 치며 좋단다. 얻어먹은 게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가까이 가자 개도 이쪽으로 걸어오는데 나는 걸음을 멈추고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수님은 스페인 개들이 대개 아주 순하다고 하셨다. 개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고 하신다. 매일 두세 번씩 산책을 하고, 용변은 밖에서 해결하니 한국 개들에 비해 스트레스가 덜 쌓일 것이라는.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또 신기한 것은 공원에서 개들이 종종 마주치는데 싸우는 걸 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내가 어릴 적엔 우리 개가 동네의 다른 개들과 싸워서 이기면 우쭐해지곤 했다. 노름의 일종인 투견은 좋아하지 않지만 개들이 싸우는 건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 개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만났을 때 서로의 냄새를 확인하는 것도 별로 못 봤다.

마드리드에서 개를 산책시키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는데, 바르셀로나의 Nord 버스터미널 근처의 큰 공원에 가니 여긴 마치 개들의 천국 같다. 공원에서 줄에 묶이지 않은 셰퍼드가 내쪽으로 와서 겁을 덜컥 먹긴 했지만;; 구엘 공원에서 한낮에 열심히 달리기를 하는 주인 뒤를 혀를 내밀며 헉헉대면서 따라가는 개와 여행객이 수도꼭지를 눌러주는 사이 수돗물을 맛있게 먹는 개를 보며 미소짓기도 했다. 

한국에서나 외국에서나 개들은 나를 미소짓게 하는데 어젯밤에 여기서 30년을 사신 분의 말씀을 들으니 여기 개들의 삶이 그다지 행복하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얘기가 나온 계기는 이렇다. 밤에 저녁을 먹고 담소를 나누던 중 밖에서 개짖는 소리가 났다. 문득 여기서 개짖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아 여쭤보았는데 놀랍게도 여기 개들은 보통 성대 수술을 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무차별 임신을 막기 위해 개들의 성기를 수술한다고 한다. 개들이 10년 이상 오래 살지만 결국 인위적인 조작을 당하며 인간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전에 본 EBS 다큐멘터리에서처럼 개들은 야생을 버리고 인간에게 복종하는 대가로 안정적인 삶을 얻었다. 불만이 없는지 개들에게 물어볼 수는 없지만, 그렇게 수술을 시킨다니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한국의 개들이라고 행복한 건 아닐 것이다. 보통 산책도 잘 못 하고 집에서 갖혀 살아야 하고, 잘 짖어야 좋은 개라는 소리를 듣는다. 집을 지켜야 하는 개. 못 믿을 사람들에 대해서는 있는 힘껏 목청을 높여야 하는 개. 한국 개들의 높은 소리는 그 개와 나와의 먼 거리 뿐 아니라 그 개를 소유한 바로 옆집 사람들과 나의 머나먼 심리적 거리를 떠올리게 한다. 언제부터 우리는 모르는 개와 사람을 이렇게 무서워하게 되었는가. 왜 우리는 더 가까워질 수 없게 된 걸까.

잘 짖는 개는 외딴 곳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실용적인 가치가 있을 것이다. 어제보니 여기 개도 짖긴 짖는다. 아직 수술을 안 받았는지. 두 개의 다른 개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뜨렸지만, 그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한국이 떠올라서였을까. 어디에서도 개들은 안식을 취할 수 없다. 인간도... 언젠가 마당이 너른 집에서 개들을 키우면 좋겠다는 꿈이 정말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반응형

'스페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Day 1: 길고 긴 하루  (0) 2009.06.26
스페인에서 돌아와서  (0) 2009.06.18
출국 전 인천공항에서  (0) 2009.05.27
삶은 여행  (0) 2009.05.26
스페인 국내 여행  (0) 2009.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