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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스페인에서 돌아와서

by wannabe풍류객 2009.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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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7일 새벽에 시작된 스페인 여행이 오늘 오후 2시 인천공항에 도착하며 끝났다. 단순한 해외여행이라기엔 형네 집에서 지낸 기간이 꽤 길었기에 규정하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더구나 내 인생에서 경험하지 못한 몇 가지 사건이 있었기에 유쾌한 일상탈출이라고 하기 힘들었다. 

내게 스페인은 우선 형이 지금 살고 있는 외국이었다. 형네 집에서 지낸 시간이 많았기에 매일매일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는 관광은 아니었다. 해외여행에서 확실하고 저렴한(거의 돈이 들지 않는) 거처가 있다는 건 큰 장점이지만 낯선 여행의 충격으로 피곤을 느끼고 난 후 너무도 쉽게 집 안에서 안주하고 말았다. 

아주 일순간이었지만 이번 여행을 규정짓고 만 사건이 있었으니 가짜 경찰로 추정되는 두 남성에게 곤욕을 치른 것이다. 지금이야 곤욕이라고 편하게 표현하지만 당시에는 상당한 위협을 느꼈다. 며칠 전 똘레도에서 생고생을 한 이후 밤 늦게 마드리드의 에스페란사 메트로역을 나와 집으로 가는 중이었는데, 순간 두 명의 건장한 남자가 다짜고짜 나를 붙잡았다. 뭔가 심각하게 잘못되었음을 감지하고 몸부림을 치고 고함을 질러댔다. 왜 그러냐, 도와달라고. 마침 같은 메트로를 타고 나온 사람이 좀 있어 그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두 남자는 경찰 신분증을 보여주며 나보고 진정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이 사복 차림이었던지라 신분증이 진짜인가에 대해 반신반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경찰이라면 왜 나를 잡았을까? 잠복 근무라기엔 그들은 너무 노출된 위치에 있었고, 내가 물어봤을 때 달리 대답을 해주지도 않았다. 그렇게 큰 비밀이라서? 마치 수색을 하는 척하며 내가 들고다니던 비닐가방을 들춰보았다. 하지만 돈될 것은 하나도 없다는 걸 쉽게 알아차렸으리라. 그리곤 계속 내 여권을 보여달라고 독촉했다. 내가 바로 지척에 형 집이 있고, 거기에 두고 왔다고 말하자 다른 신분 증명 서류는 없냐고 물어보았지만 그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필요하면 집에 가서 확인시켜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나보고 진정하라고 하더니 그냥 보내준다. 

여행 책자에 나오는 가짜 경찰은 보통 대로에서 사복 차림으로 차를 타고 가면서 경찰 신분증을 보여주며 여권을 요구해서 여권이나 가방을 가로채는 수법을 쓴다고 했다. 또 경찰은 보통 제복을 입고 무장을 한 상태이고, 최근엔 여행자의 여권을 요구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충격이 커서 사건 이후 인터넷을 많이 검색해봤지만 그네들이 진짜 경찰인지 아닌지 아직도 확신은 할 수 없다. 하지만 가짜일 가능성이 큰 것 같다. 전철 역 바로 앞에서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범행을 저지르려고 했다는 것이 걸리지만, 그 현장에서 주변의 사람들이 구경만 하다 내가 좀 진정하는 것 같자 그냥 가버리는 것을 보며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혼자 하는 여행이라도 국내와 해외는 분명 달랐다. 스페인어를 거의 모르니 말을 걸기도 힘들고, 영어가 통하지 않는 곳도 많다. 식당에서 오늘의 메뉴(메뉴 델 디아)를 주문하려고 해도 첫번째, 두번째 접시에 음료, 후식까지 각 순서마다 알지도 못하는 음식들이 다양해서 선택에 애로가 많았다. 또 대도시의 유명한 거리에서는 소매치기에 주의를 기울이느라 제대로 구경을 하지도 못했다. 가이드도 없이 론리 플래닛의 스페인 여행 책자 하나만 들고 돌아다니는 도중 길도 많이 잃었고, 예상치 못한 상황도 너무 많았다.

그네들의 눈에 나는 아마도 중국이나 일본에서 스페인말도 모르고 와서 사진이나 찍고 쇼핑이나 하는 무개념 관광객의 하나로 비춰졌을 것이다. 이젠 한국인 관광객도 많이 늘었고, 중국인 점포는 스페인 내에 엄청 많아서 황색 피부의 동양 사람이 낯설지는 않겠지만 내가 당했던 그 사건처럼 쉬운 먹잇감이기도 하다. 내가 여권을 갖고 있었다면 멋모르고 덥썩 내주었을 가능성도 많았을 것 같다. 악몽이 그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다.

돈쓰러 간 관광이 아니었으니 약간의 각오는 되었지만 준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몸으로 겪는 외국 생활은 쉽지 않았다. 그 이야기들을 생각나는대로 천천히 블로그에 정리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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