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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orary

70분 간의 연애 - He & She

by wannabe풍류객 2009.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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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보기로 작정했다. 애송이였던 고3 시절 동숭동의 의대에 다니던 선배가 자기는 연극을 한다고 은근슬쩍 꼬드기던 게 언젠데 이제서야 혜화역에 내려 연극을 한 번 보기로 한 것이다. 학교에서 노어노문과 친구들이 하는 연극을 본 것이 여태껏 본 유일한 것이라 기대도 되었는데 찾아보니 연극이 하도 많아 어느 걸 봐야 할 지 고민이었다.

영화 관람료를 만 원으로 올리면 큰 일이나 날 것 같은데, 연극은 2, 3만 원씩 한다. 고민이 좀 되는데 그럼에도 보러 가는 사람들이 많다니 뭔가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다행히 예매를 하면 20~40% 정도 할인된다. 카드 할인도 있는데 이번에 적용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여러 번의 고민이 있었지만 가벼운 연극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게다가 수능본 애들만 할인하는 거 없이 그냥 새해맞이로 40%를 할인해준다는 유혹적인 제안을 한 "70분간의 연애 - He & She"를 선택했다. 25,000원에서 15,000원으로 할인이 되는데, 인터넷 예매라 여지없이 500원의 수수료가 붙긴 했다.

1월 10일 저녁 7시 공연. 하필 그 날 오후 세 시엔 과 후배가 올림픽파크텔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터라 결혼식에서 오래간만에 보는 많은 선후배, 동기가 있었음에도 식이 끝나고 제공된 식사를 다 먹은 직후 자리를 떴다. 

혜화역에 금방 가려니 했건만 방이동에서 버스로 천호역가고, 두 번 환승하니 거의 50분은 걸린 것 같다. 어렵사리 상상화이트 소극장을 찾아서 예매한 티켓을 받으려고 했는데 6시에 와서 받으라고 하길래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직원분이 마음을 바꾸셨는지 티켓을 내주셨다. 피자헛에서 새로나왔다는 파스타를 먹고 간단히 저녁을 해결하였는데 시간이 금세 흘러 극장으로 다시 향했다.

장소 이름이 소극장이지만 얼마나 작은지는 전혀 몰랐다. 대기하는 장소엔 무수한 커플로 북적여서 앉을 자리는 물론 없었다. 이 연극은 티켓과 함께 제공된 포스트 잇에 사연을 적어서 준비된 함에 넣으면 나중에 뽑아서 선물을 준다. 극장에 들어가니 자리가 너무 좁다. 하나의 긴 의자에 6명씩 앉는데 옆 사람과 밀착해서 앉아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앞뒤 간격인데 연극을 보는 도중 다리에 불편함을 느꼈다. 원래 소극장은 이런 걸 감안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앞에는 아담한 무대가 마련되었다. 집중은 잘 될 듯 싶었다. 

온갖 재주를 부리는 오석봉(석이준)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인물은 말을 안 한다. 무술 수행 중이라는 게 이유인데 연극이 끝나고 말을 하는데 원래부터 발음이 좋지는 않은 사람인지 아니면 하도 말을 안 해서 말이 잘 안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남녀 커플이 등장한다. 이준식(변현석)과 송지수(김나미). 주인공이다. 교통 사고 얘기를 하는 듯 하더니 지난 밤 둘 사이에 있었던 (육체적) 사고에 관한 내용이었다. 대학교 이전부터 10년도 넘게 친구로만 지낸 둘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섹스를 한 것에 대한 합리화 과정이 펼쳐진다. 이성적으로서 좋아했지만 그걸 표현하지 못하고 쿨한 척 지내고, 서로 상대보고 다른 사람과 사귀라고 했던 둘. 결국 둘은 아주 오래전부터 서로를 이성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해피 엔딩을 맞는다.

그 과정에 테디 베어, 언어통역기, 포스트 잇, 연극 막판 천정에 화려하게 펼쳐진 조명 등이 둘 사이의 사랑을 확인하게 만드는 묘약이 된다. 어찌 보면 꽤나 작위적인 설정이라 보는 도중 거부감이 생기는 건 어쩔 수가 없는데, 연극의 흐름이 잘 짜여서인지 막판엔 이대로 더 밀어부치다간 메마른 내 눈에서 눈물이라도 나올 판국이었다. 

이 연극은 홍보 행태를 봐도 그렇고 커플을 위한 연극으로 볼 수 있는데 내용 자체도 알고 보면 남사스러운 터라 조금 애매한 커플이 보기엔 어떨지 모르겠다. 

영화는 질리도록 봤고, 프로 배우가 하는 연극은 이번이 처음인데 확실히 둘의 차이가 있다. 영화는 가끔 그리고 대부분 장사속으로 감독판 같은 새로운 편집본이 나오지만 연극은 여러 명이 같은 역할을 돌아가며 하기도 하고 동일 인물이 계속 연기를 하더라도 매번이 완전히 같지가 않고 그럴 수도 없다. 이 연극의 이전 모습은 당연히 내가 알 수 없는데 남자 주인공의 모습이 가장 많이 바뀐 것 같다. 오석봉이나 송지수는 인터넷 예매를 할 때 봤던 그 모습들인데 이준식은 배우가 다른 가라는 의심을 계속해서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 모양이 완전히 바뀐 데다가 안경까지 써서 타인이라고 봐도 믿을 것 같다. 이건 지엽적인 차이이고, 영화가 아무리 실감이 나도 완전한 감정이입이 잘 안되는 반면 연극은 바로 내 눈 앞에서 (실례겠지만) 만질 수도 있는 배우들이 연기를 하니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필름과 영사기가 돌려대는 같은 내용이 아니라 매번 작은 변화가 있는 연극이 주는 묘미가 있으리라.

투비컴퍼니(http://www.tobecompany.co.kr/)라는 곳에서 만든 연극인데 "70분간의 연애"의 두번째 이야기도 있는 모양이다.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작은 기대를 하고 볼 수 있는 연극이었다. 다음엔 조금 더 무거운 주제라도 고전에 해당하는 연극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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