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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우연히 발견했고 약간 무리해서 영화를 봤다.
분명 2008년 초(이미 2009년이라 2008년이 지났다는 게 어색하기만 하다) 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많이 바빴는지 별로 신경을 못 썼고, 영화는 감독의 기존 작품들처럼 개봉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극장에서 사라졌다.
그러던 와중 연말에 볼만한 영화들을 알아보기 위해 맥스무비에서 목록을 살펴보던 중 밤과 낮이 스폰지하우스 압구정에서 단 한 번 상영되는 것을 발견했다. 12월 29일 낮 1시 35분. 연말의 바쁜 일정 중에 소화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더 전 직장이 가까운 터라 친하던 분들과 얼굴도 볼 겸해서 갔다. 혼자 스폰지하우스 압구정에 가기는 처음이다.
처음으로 놀란 것은 상영 시간. 어찌된 일인지 90분 정도의 표준적인 상영 시간으로 알고 갔건만 표에 적힌 시간은 거의 1시간 정도 더 길게 영화를 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어리둥절해져서 직원에게 물어볼 뻔했다. 하지만 140분이 넘는 시간은 오히려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다.
이 영화의 존재를 다시 깨닫게 된 것은 네이버에 영화평을 쓰는 이동진씨의 글 때문이었다. 극찬. 관객의 철저한 외면과 달리 많은 평론가들은 홍상수 영화를 극찬한다. 오늘 살펴보니 2008년 최고의 영화 순위에서 밤과 낮은 1위로 많이 꼽혔다. 그렇게 훌륭한지 몰라본 게 영화의 진정한 가치인지도 모르겠다. "생활의 발견"을 보며 그다지 에로틱하지 않고, 웃기기만 한 베드신에 박장대소한 것이 홍상수 감독 영화와의 첫만남이었다. 나는 그저 낄낄대며 웃기는 감독이라고 생각하는데 평론가들은 다른 면, 더 심오한 면을 잘 발견하는 모양이다.
영화에서 품게 되는 의문들: '구름'이 무엇을 말하나? 북한 사람으로 나온 이선균은 뭔가? 팔씨름은? 거짓의 캐릭터인 박은혜는 정말 임신했나? 황수정이 정말 나왔나(물론 나왔다. 하지만 난 주요 캐릭터인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새는? 비닐봉지는? 밤과 낮은?
관객들과 홍상수 감독의 질의 응답 내용이다. 감독은 잘 말해줄 것 같지 않은 영화의 비밀을 별 거 아닌 듯이 털어놓아서 잔뜩 품은 기대를 깬다. 내가 영화를 보며 품었던 많은 질문들에 대한 답이 담겨있다.
"밤과 낮"이라는 제목부터 인상적이다. 흔히 '밤낮으로'라는 말을 쓰지만 '낮과 밤'이 더 정상적인 표현같다. 낮에 활동하고 밤에 쉬는 것이 순리로 보여서일까. 지구 어떤 곳에서는 하루가 밤만 있기도 하고 낮만 있기도 하다지만 지구가 자전을 하는 한 밤낮이 바뀌는 건 어쩔 수 없다.
주인공은 대마초를 피웠다가 찌질하게 파리로 도주했고 한국에 언제가면 좋을지 저울질하고 있다. 그러나 도망간 곳엔 10년 전 애인이 있고, 한국인들이 잔뜩 있고 하필 박은혜 같이 젊고 예쁜 여자까지 있다. 아무도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곳으로 도망가려 했는데 10년 전 애인이 나타나 몇 번의 중절 수술을 했다고 털어놓고 다시 자기를 사랑할 것을 강요한다. 박은혜는 매력적이지만 주변 평판이 좋지 않고 실제로 남의 미술 작품을 도용했다.
비행기로 10시간 이상 넘게 날아간 곳, 한국보다 하루가 8시간 늦은 곳. 파리의 낮은 한국의 밤. 주인공은 화가지만 대마초를 피우는(예술가와 마약은 오히려 너무 가까운 면이 있지만 진리를 표현하는 사람으로서 반칙을 범한 것이기도 하다) 이중성(이 말은 영화의 키워드처럼 자주 쓰인다. 모든 것이 이중적이고 표리부동이다)의 화신. 아내는 한국에서 홀로 걱정에 시달리며 지내지만 주인공은 파리에서 천진난만한 얼굴로 여러 여자를 만난다. 그리고 파리의 새벽에 한국의 아내와 전화를 하며 괴로워한다.
주인공의 부조리는 어딘가의 밤이 다른 곳의 낮인 것처럼 이상하지만 당연한 것처럼 비춰지기까지 한다. 누군들 옛 애인이 없을 것이며 배우자가 있더라도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다른 사람에 유혹당하지 않겠는가. 문제가 생기는 건 배우자가 법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박은혜가 임신을 했다는데 주인공은 도망을 쳤다. 그렇게 사랑한다고 안고 싶다고 자고 싶다고 말해 놓고는 한국의 아내가 임신했다고 (거짓말로) 말하자 파리의 삶을 미련없이 정리하고 떠난다. 주변에 있던 다른 관객은 남자가 다 그런 거다라고 평했다. 남자가 유전적으로 자기 씨를 많이 퍼뜨리도록 디자인되었다고 하더라도 법적으로 구속된 배우자에게 더 얽매일 수밖에 없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바람핀 게 걸려서 이혼하면 금젅거 손해를 많이 보기도 하고, 결혼한 상태에서 바람피는 것 자체로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어쩔 수 없이 현실 세계를 떠났지만 잠시 머무를 파리에서 불장난을 열심히 했다가 손을 털어버렸다. 그의 마음은 박은혜가 진실한 여자가 아니라는 점 때문에 별로 불편하지 않았으리라. 영화 마지막의 꿈은 임신했을지도 모를 박은혜를 버린 것에 대한 자기방어이기도 하다.
구름을 그리는 화가는 무엇일까. 평소 구름 보는 게 좋긴 하다. 만화에 종종 나오지만 바람에 날리는 구름은 시시각각 모양이 변하여 인간 세계에 있는 사물이나 인간, 동물을 닮을 때가 있다. 삼라만상일까? 정체가 없이 아무 것으로나 변하는 진실되지 못함의 상징? 뜬 구름을 잡는 사람? 태양을 가리는 존재? 구름이 있어야 비가 오니 농업적으로 중요하지만 막상 생각해보니 구름은 그다지 긍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다. 감독은 주인공을 희화화했음이 분명한데 그다지 주인공이 싫지 않음은 내 마음이 더럽혀져서인가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보편적 감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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