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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글을 써서 '발행'한다는 것에 강박관념을 갖게 됨과 동시에 상당한 무책임함도 동반되었다. 자유로운 포스팅의 이상은 물건너간지 오래. 조회수와 추천수에 목을 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주말에 원주에 다녀왔다. 많이 어정쩡했던 어머니 생신 '행사'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갈수록 나를 버겁게 하는 조카 녀석과 더불어 김동리의 소설 두 편을 읽은 것이 기억에 남을 일이다. 김동리에 대해선 들어봤지만 그의 소설을 읽은 기억이 없었다. 전에 사둔 <황토기>라는 소설집을 집어들고 '황토기'와 '실존무'를 읽었다.
'황토기'는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시대 배경도 별로 중요해보이지 않는 한국의 어느 마을인 황토골. 억쇠는 황토골의 탄생 설화의 산물로서 그 운명에 종속되는 것 같지만 그 자신이 그 전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신화적 이야기. 득보와의 싸움은 서로의 살점을 크게 뜨어내는데 이후에 불구가 되었다거나 하는 장애에 대한 별다른 언급도 없다. 억쇠는 단지 자신과 힘을 겨룰 대등한 존재의 등장만으로도 삶의 의미를 찾게 된 것인데 이렇게 대단한 힘 자체가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억쇠가 자기를 드러내지 말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기장수 설화의 논리 때문이다. 단지 초인적 힘을 가졌다고 누구나 중국(즉, 천하)까지 제패할 장군이 되는 것은 아닐 터인데 사람들은 마을의 탄생 설화에 왜 그리도 집착했을까. 왜 튀는 사람이 되면 안 되는 것이었을까. 반역을 두려워한 지배층의 억압 때문일까. 분이와 설희라는 여성들은 두 용의 다툼에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억쇠의 아이를 잉태한 설희는 분이의 칼에 맞아 죽고, 억쇠라는 영웅은 자손을 남기지 못한다. 그러나 억쇠의 아버지가 영웅이 아닌 이상, 억쇠의 자손이 영웅일 개연성은 있을까. 현재로서는 의문만 던져볼 뿐이다.
'실존무'라는 소설은 1951년부터의 부산에서의 이야기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대놓고 실존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실존의 춤. 이 소설도 불가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만년필 장수와 밀크하우스(? 밀크숍?)를운영하는 젊은 여인의 운명적 만남. 전쟁 때문에 양산된 이산 가족. 배우자를 이북에 두고온 사람들은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새로운 사랑을 망설임. 어렵사리 사랑에 성공했으나 이북의 가족이 등장하며 파국. 첫 만남에서의 통함은 결합을 예고했고, 비극적 결말도 예고했다. 내 자신이 실존주의를 잘 모르지만 백과사전적 설명을 보면 소설은 일반적인 실존주의 개념을 소설화한 것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실존의 춤. 실존주의는 찰나주의와 정말 다른 것일까. 코카 콜라의 생경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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