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풍, 비, 황사. 밖에 나가고 싶지 않은 날이었지만 불가피하게 텝스를 보러 삼성고등학교로 가야 했다. 점심을 먹고 졸려서 3시 시험이 늦을까 걱정을 하면서도 기어이 선잠을 잤다.
버스를 타고 학교에 도착하니 십분 이상 여유가 있었다. 책상마다 모 출판사에서 제작한 작은 메모장이 놓여있었다. 고등학교. 먼 기억이다. 토익, 텝스 이런 게 아니면 갈 일이 없어진 곳. 그다지 감상에 젖지도 않았다. 잠시 있다가 가면 된다.
시험본 게 2년이 가까워 오고, 특별히 알아보지도 않고 시험장에 갔더니 각 파트의 제한 시간이 몇 분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실 몰라도 상관은 없다. 듣기는 바로 답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시간이 더 주어진다고해도 소용이 없다. 문법, 어휘는 시간이 항상 모자란다. 그나마 여유있는게 독해지만 그렇다고 해서 헛갈린 리딩 파트의 문제를 더 풀 시간이 충분하지는 않다.
하나 문제가 될 뻔한 것은 수험번호였다. 답안지와 문제지에 수험번호를 적어야 하는데 준비물로 되어 있는 수험표를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스트잇에 수험번호를 적어 지갑에 붙여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처럼 준비가 되지 않은 몇 명은 칠판에 붙어있는 자리 배정표에서 수험번호를 보고 베꼈다.
이래저래 시간이 흘러 듣기 시험이 시작되었다. 처음 몇 문제는 쉬웠다. 그런데 어느새 당황하고 만다. 잘 안들리는데다 한 번 밖에 들려주지 않는 처음 30문제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오히려 긴 문장이자만 두 번씩 들려주는 그 다음 30문제가 수월했다. 많은 문제를 거의 찍으며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문법과 어휘에서도 암초를 만나기는 이전 시험의 경험과 마찬가지였다. 문법이 추리할 거리라도 있다면 어휘에서 보기에 아는 단어가 하나도 없는 문제를 볼 때의 당혹스러움이란. 외웠다가 집에서 확인하려 했는데 아쉽게도 몇 개 기억이 나지 않았다. 틀린 문장을 고르는 문제에서 상당히 재밌는 걸 발견했다. 보통 어순이나 단수 복수 등 문법 상의 오류를 짚어야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마련인데 특정단어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전혀 다른 의미의 단어를 넣어놓았던 것이다. 이럴 수도 있구나 하고 피식 웃고 말았다.
독해는 그나마 나에게 희망을 주는 듯 한데 지문을 읽다보니 독해 능력은 사실상 자신이 갖고 있는 전반적 지식 수준을 묻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내 전공인 국제정치 지문을 보며 반가워하고, 영문학, 영화, 자연과학 등 그나마 들어본듯한 내용이 나오니 안심이 되기도 했다. 나의 지식이 많을 수록 독해는 더 빨리 끝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듣기에도 특정 전공에 해당할 내용이 몇 개 있었다. 텝스 성적을 단기간에 올리기가 쉽지 않은 이유일테다.
2시간 이상을 계속 집중해서 듣고 읽고 마킹하는 게 쉽지는 않다. 시험이 끝난 후 가슴에 갑갑함을 느끼며 교실을 나섰는데 밖이 노랬다. 내 눈이 잘못 된 게 아니었다. 마치 이 세상이 아닌 것 같은 풍경이었다. 황사 탓이다. 그 때문인가 내가 타야 할 버스 번호와 마지막 자리가 다른 만원 버스를 억지로 탔는데, 당연히 버스는 엉뚱한 방향으로 갔고 나는 당황해서 내렸다. 배드 럭인지 굳 럭인지 시험 성적이 발표될 30일에 알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