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주기를 이틀 앞둔 힐스보로 참사를 추모하는 경기이자 얼마 남지 않은 이번 시즌 프리미어 리그의 우승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경기라고 이야기되었던 리버풀과 맨체스터 시티의 경기가 끝났다. 1989년의 참사로 사촌을 잃은 리버풀 주장 제라드는 치열했던 경기가 승리로 끝난 후 눈물을 보였다. 전반전을 2:0으로 편하게 앞선 상태에서 후반전 거의 역전을 허용했던 상황마저 리버풀이 극복하며 리버풀 로컬 보이 제라드는 길었던 리버풀 리그 무관을 끝낼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던 것일까?
SBS의 중계진은 알아채지 못했지만 제라드의 눈물은 단지 제라드의 화려한 우승 트로피, 메달의 진열장에 없는 단 하나의, 그리고 최대의 수확물을 얻을 가능성이 아주 높아졌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힐스보로 참사와 그의 사촌에 대한 기억도 큰 몫을 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잉글랜드 리그에서 7,80년대 최고의 팀으로 군림한 리버풀의 몰락은 힐스보로 참사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었다. 케니 달글리쉬가 리버풀을 떠났고, 후임 감독 수네스 시절부터 망가진 팀은 퍼기의 맨유가 떠오르며 과거의 영광을 꿈만 꿀 수 있었다. 울리에와 라파는 우승 문턱까지 리버풀을 이끌었지만 모두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리버풀을 응원하는 이들의 오랜 염원을 젊은 감독 브렌던 로저스가 이룰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퍼기가 은퇴한 이번 시즌이 맨유 이외의 팀에게 리그 우승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많은 이들이 점쳤다. 맨시티와 첼시는 모두 명장을 새 감독으로 앉혔지만 그들의 첫 시즌이라는 점에서 언제나 우승권에 근접한 편인 아스날에게도 좋은 찬스였고, 베일을 판 돈으로 우수한 선수를 대량 영입한 토트넘에게도 일말의 희망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난 시즌 7위 팀 리버풀이 지금 이 시점에 리그 1위를 하리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번 시즌 리버풀의 성적은 참으로 독특하다. 리그 초반 장기 출장정지 상태의 수아레스 없이 리버풀은 스터리지의 득점에 의존하며 좋은 출발을 보였다. 시즌이 진행되며 스털링이 부활했고, 돌아온 탕아 수아레스는 유례없는 득점력을 펼쳤고, 엔리케의 시즌 아웃과 시소코의 부진 끝에 투입된 그리고 아무도 임대로 데려가지 않았던 플래너건이 지금까지 왼쪽 사이드 주전 수비수로 뛰고 있다. 그 밖에도 리버풀이 도대체 어떻게 이런 성적을 내고 있는지 의아한 대목이 많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결국 모든 성과의 핵심으로 브렌던 로저스 감독이 지목되고 있다.
예전에 자신감이 지나쳐 자신의 말을 책임지지 못할 상황에 종종 빠졌던 로저스가 자세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리버풀의 목표는 다음 시즌 챔피언스 리그 진출이라는 말을 반복하다보니 어느덧 리버풀은 우승 후보 그것도 현재 가장 강력한 후보가 되었다.
역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상황이라 길게 설명할 것은 없지만 리버풀의 최근 10연승은 파죽지세만은 아니었다. 하위권팀에 대량 실점을 하거나 진땀을 빼며 겨우 이기기도 했고, 행운도 많이 작용했다. 오늘 경기만 해도 수아레스는 시뮬레이션 액션으로 퇴장을 당할 수도 있었고, 스크르텔의 핸드볼 파울로 페널티킥을 내줄 수도 있었다. 물론 스터리지의 부상 정도와 헨더슨의 출장정지 경기 수가 남은 리그 네 경기의 성적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그러나 과학적 근거는 전혀 없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이 분위기에서 정말 리버풀이 우승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 생긴다.
경기가 승리로 끝난 후 오래간만에 안필드를 찾은 미국인 구단주 헨리는 젊은 아내를 대동하고 한껏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서야 자신이 투자를 아주 잘 했다는 성취감을 맛보고 있을까? 리버풀 지역 공동체의 거의 100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추모하는 스카우저들과 이 미국인이 나란히 선 그림은 완벽히 조화롭지는 않지만 어찌되었건 사반세기 동안 이루지 못한 리버풀 사람들, 리버풀 팬들의 꿈이 달성되기 직전이다.
사실 경기 전에 결과가 리버풀의 승리로 끝나리라고 믿지는 않았다. 맨체스터 시티는 최근 판정의 덕을 유난히 많이 봤던 팀이고, 선수 개개인의 능력을 감안하면 누가 봐도 우승 1순위 팀이다. 맨시티가 안필드에서 승리한지가 오래 되었다지만 로저스가 리버풀에서는 아직 맨시티를 이긴 적이 없다는 반대되는 결과를 예고하는 통계도 있었다. 실제 경기는 후반전이 된 후 무승부내지 리버풀의 패배 분위기였다. 아구에로가 경기장에 들어섰을 때 패배를 두려워한 리버풀 팬들이 많았으리라. 게다가 아구에로는 정말로 다비드 실바에게 완벽한 기회를 만들어줬다. 맨시티 주장 콤파니의 실수가 쿠티뉴의 골로 이어진 후에야 리버풀의 승리를 안심하며 기다릴 수 있었다.
리버풀이 스터리지를 잃었지만 맨시티가 야야 투레를 잃었고, 맨시티가 어쨌거나 두 경기를 더 치러야 하기에 리버풀이 큰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거짓말같은 우승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우승의 향배를 리버풀 스스로 결정할 기회가 계속 남아있다는 상황이 좋다.
돌이켜보면 리버풀의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이 블로그에 글을 많이 썼다. 그래서 이번 시즌엔 별로 쓸 게 없었다. 앞으로도 별 걱정없이 서포팅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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