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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전3권 -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까치글방 |
순전히 우연히 발견했고, 남들의 호평을 믿고 사서 읽어본 책인데 역시나 읽을만했다. 아니 잠을 못 자게 만든 책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학문 관련 도서를 주로 출판하느 까치글방에서 소설 번역서를 출간했다는 것도 처음 안 일이었다. 작가인 아가타 크리스토프씨는 여성으로 작년에 돌아가셨다. 헝가리 출신이며 2차 대전 와중에 오스트리아를 거쳐 스위스에서 정착했고, 모국어인 헝가리어 대신 프랑스어로 생활하며 글을 써서 발표했다.
3권에 있는 옮긴이의 말을 보면 작가가 처음부터 삼부작을 염두에 두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세 권의 책은 연결되는 하나의 이야기로 보인다. 그렇지만 알라딘의 독자평 중 일부는 삼부작의 연결성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저자의 천재성을 칭찬하는데 그것은 맞지 않는 말일 수 있다.
많은 이들이 평가를 내린 책이라 새로운 말을 더하긴 어려울지 모른다. 확실히 세 권을 다 읽고 나면 사실이 무엇인지 헛갈릴 수밖에 없다. 첫번째 책이나 두번째 책이나 세번째 책을 읽고 나면 엄청난 허구이긴 마찬가지다. 네 살 때 헤어진 쌍둥이가 15살 때까지 같이 있었을리도 없고, 국경마을에 남아있던 것은 클라우스였던 이상 루카스가 남았다는 두번째 책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거짓이다.
1, 2권이 수십 년만에 고향에 돌아온 루카스가 쓴 이야기라면 그는 국경을 넘기 전까지의 삶을 더 비극적으로 그려보고, 또 만약 자기가 할머니 집을 지키고 있었다면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를 생각해보던 것이었을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국경을 넘었던 것은 루카스였고, 할머니 집에서 살았던 것도 루카스였는데 만약 클라우스와 실제보다 10년 정도 더 오래 같이 생활하고 또 그가 국경을 넘어갔다면 홀로 남은 자신은 어떻게 살았을까를 상상해보는.
루카스는 너무 오래 어머니, 클라우스와 헤어졌고, 이국 땅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내야했다. 그는 국경을 넘으며 자신의 이름을 루카스(Lucas)의 철자 배열을 바꿔 클라우스(Claus)로 바꿔 이후의 삶을 살았다. 그는 클라우스가 되었지만 여전히 루카스기도 했다. 그러므로 루카스가 국경마을에 남은 것은 거짓이지만 국경을 넘은 소년이 클라우스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원래 그의 쌍둥이 형제인 클라우스는 K로 시작하는 클라우스였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시집을 출간하며 Klaus Lucas라는 이름을 쓰며 헤어진 형제를 기억했다.
피차 서로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쌍둥이라는 특성상 그들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서로의 존재를 잊을 수 없었다. 루카스는 타지 생활을 하며 고국에 남은 혈연이 그리웠을 터이다. 애초에 그는 소련 지배의 헝가리를 떠나긴 했으나 딱히 자유를 찾아 떠난 것은 아니었다. 클라우스는 루카스만 찾는 어머니를 평생 모시며 루카스라는 존재를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루카스는 병이 심해지고, 국경을 넘는 것이 훨씬 쉬워진 다음에 고국에 돌아가본다. 외국어(아마 독일어)를 유창하게 하며 법적으로 외국인이었지만 그는 자기를 찾지 못한 어머니가 아닌 마귀, 혈연 관계도 없는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국경마을로 돌아온다. 그는 클라우스를 찾는다고 했지만 애초에 클라우스가 거기에 살리가 없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보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이 총을 맞았다는 것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가족과 함께 했던 네 살 이전의 기억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루카스에게 어린 시절 고국의 삶이란 재활원에서의 그리고 가짜 할머니와의 삶이 전부였다.
클라우스는 죽지 않았다는 것은 짐작했지만 정말 돌아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루카스가 자신을 찾아오자 자신의 형제 루카스는 재활원에 있을 때 폭격으로 죽었다며 루카스의 존재를 부정해버린다. 그리고 엄연히 살아있는 어머니는 어릴 때 돌아가셨고, 자신은 고아로 컸지만 운이 좋아, 사라와 결혼해서 가정을 이뤘다는 거짓말을 비롯해, 행복한 삶을 살아왔다고 말한다.
클라우스는 형제와의 상봉의 기쁨을 느끼긴 커녕 평생 이어진 어머니의 루카스 편애가 더 발작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했다. 뜻하지 않게 형제를 만나게 된 루카스의 반가움은 형제의 차가운 반응과 함께 사그라들었고 고국에서 자살하고 만다.
이 쌍둥이 형제의 불행은 아버지의 외도와 사생아 출산이라는 개인적 차원에서 시작되었지만 아버지가 굳이 가족을 버리기로 한 것은 전쟁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던 헝가리는 파시즘과 공산주의에 차례로 유린당했고, 루카스, 클라우스 형제와 같은 불행한 가족은 헝가리나 다른 유럽 지역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는지 모르겠다. 작가인 아가타 자신의 자전적 경험이 많이 녹아든 이 소설은 시대의 불행이 개인의 삶을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는지를, 2차 세계대전이 많은 인명 피해가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볼 수 있는 절절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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