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스보로 독립 패널이 힐스보로 참사의 진상을 명확히 공개한 이후 안필드에서 처음 열리는 경기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한 것이었다. 여전히 수아레스와 에브라의 인종차별 발언, 악수 거부 사건의 앙금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잉글랜드의 전국적인 힐스보로 희생자 추모 분위기는 잊고 싶은 선수들간의 문제를 해결할 좋은 명분을 제공했다. 그리고 안톤과 존의 또 다른 인종차별 발언 사례와 달리 두 선수는 드디어 악수를 나눴다.
그러나 무고한 죽음을 당한 96명을 위해 맨유의 보비 찰튼까지 꽃을 들고 등장한 이 날, 보고서 발간 이후 줄기차게 악의적인 챈트(chant. '떼창'이라고 옮겨지기도 하지만 나는 적당한 번역이라고 보지 않는다)를 없애자고 캠페인이 벌어지고 리버풀 레전드 중 하나인 올드리지가 고인들을 모욕하는 함성을 지르는 팬들은 영원히 경기장에서 추방해야한다고까지 말하던 이 날도 여지없이 두 팀의 서포터들은 상대방의 참사를 조롱했다.
리버풀이 맨유에 패하며 리그 5라운드까지 1승도 없는 상태로 백 년만의, 혹은 알아보지 않았지만 역대 최악일 수도 있는 리그 성적을 이어가는 비참한 상황도 힐스보로 참사에 대한 엄숙한 추모 분위기를 결국 깨뜨리고 만 경기 막판의 양 서포터들의 행위만큼의 슬픔을 안겨주지는 못한다. 지금까지는 언론만의 캠페인 성격이 짙었지만 이 일을 계기로 이제는 법적, 행정적 제재 조치가 마련될지도 모르겠다.
오래간만에 경기 전체를 다 봤다. 셸비의 퇴장 장면은 다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로저스 감독의 말처럼 에반스와 다른 처분을 받아야 할 이유가 뭘까? 유일한 차이는 당시 태클 상황에서 우연히도 셸비의 축구화 바닥이 에반스를 먼저 건드렸다는 점일 것이다. 에반스가 셸비를 다치게 할 수도 있었다. 이 대목에 대한 설명은 아직 못 읽은 잉글랜드 언론들의 리포트를 참고해야겠다.
1명이 적은 상황에서 경기의 승부는 사실 결정된 것과 다름 없었다. SBS ESPN의 해설자들이 두 팀의 경기에서는 정신력이 더 중요한 요소라느니 하는 말을 운운했지만 객관적 성적에서 맨유가 우세했던 건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한 명이 적은 상태에서 '현재' 리버풀의 전력으로 맨유를 이긴다는 건 아무리 안필드라고 해도 아주 어려운 일이다. 해설자들은 리버풀 팬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거나 혹은 자신들의 설명이 틀릴까봐(공은 둥글다는 관용적 표현처럼 승부는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니까) 조심스럽게 말했던 것 같다.
수소가 투입된 후반전 초반에 제라드가 멋진 골과 감동의 세러모니로 희망을 심어줬지만 곧이어 나온 하파엘의 골은 다시 불가피한 운명을 되새기게 만들었다. 애매한 페널티킥 판정, 페페 레이나가 막을 수도 있었던 아쉬운 장면이 지나가고 승부는 그대로 1:2 패배로 결정되었다.
경기 내적인 참사로 셸비의 퇴장 뿐 아니라 보리니, 아거 그리고 켈리까지 리버풀 주전들 다수가 새로운 부상으로 당분간 나올 수 없을지 모를 전망이 더해지며 다음 몇 경기를 대비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지금도 다우닝 대신 스털링이 주전으로 나오는 상황인데 켈리가 이탈하면 최근 불안한 엔리케가 왼쪽으로, 존슨이 다시 오른쪽으로 갈 가능성이 높지만 더 어린 플래너건이나 로빈슨 혹은 위스덤을 써야할 수도 있다. 아거의 공백은 코아테스와 캐라가 번갈아 메워야 할 것이고, 보리니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아사이디나 예실을 써야할까?
리버풀의 문제는 꽤 복합적이다. 리버풀의 충신들이었던 캐러거는 너무 늙어버렸고, 제라드가 비록 어제는 득점을 했지만 계속 클럽 경기에서 부진했다. 수아레스가 패스를 하지 않는 문제도 고질적이지만 최근에 꾸준히 제기되는 건 레이나 불안 요소다. 어제는 별로 할 일이 없었고, 하파엘의 슛은 막을 수 없는 경로로 이동했지만 이전 경기들에서 레이나는 더 이상 신뢰할 수만은 없는 골키퍼의 모습을 보여왔다. 팀의 리빌딩이 기존의 튼튼한 뼈대를 남긴 상태에서 덧붙여가는 형태가 이상적이라면 리버풀은 예전에 리그 최고 혹은 세계 최고라는 평가를 받은 척추 라인이 하나도 작동하지 않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여기에 새로 온 선수, 특히 보리니의 기여가 미미하면서 리버풀은 득점은 별로 없고, 실점은 쉽게 하는 팀이 되었다.
긍정적으로 볼 부분은 이미 주전이나 다름없는 스털링이 그럭저럭 해주고 있고, 드디어 리그에 모습을 드러낸 수소도 골로 이어진 크로스를 하고, 위협적인 슛을 날리는 등 희망을 품게 만든 점이다. 코너킥 담당으로 셸비나 수소가 기용된 점도 흥미로웠다. 셸비의 코너킥은 미리 정해진 듯한 세트 피스를 통해 제라드의 골로 이어질 뻔했다. 수소의 코너킥은 1회였고 아쉽게도 별 영향을 주진 못했다. 제라드가 세트 피스 전담에서 해방되며 새로운 공격 패턴이 등장한 건 좋은 징조다.
부상 선수들이 늘어난 상황, 그리고 온갖 좋은 모습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리그에서 패배한 상태에서 곧바로 밝은 '결과'가 이어지길 기대하긴 어렵다. 하지만 이미 적지 않은 라운드가 지났음에도 1승이 없는 건 큰 문제다. 다음 노리치 경기는 어떻게든 이겨야만 하는 경기가 되었다. 가중된 부담감이 경직된 경기력으로 돌아오는 악순환이 벌어지지 않길, 그리고 리버풀과 맨유 서포터들이 고인들을 모욕하는 악의적인 챈트를 끝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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