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에서 11일에 내놓은 힐스보로 참사의 전개 상황과 그 결과에 대한 설명이다. 마지막 부분의 윌리엄스의 청원 내용을 보건대(청원은 2011년 이야기다) 기존에 쓴 글을 업데이트한 것으로 보인다.
힐스보로 참사에 대해선 많은 글들이 있지만 사건 전개에 대해서 이 글이 쉽게 잘 설명하고 있다. 글 속에 있는 플래쉬 영상을 통해 시각적으로도 사태의 진행 상황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비록 여전히 잉글랜드의 유명하고 오래된 축구 클럽들 중 하나의 경기장 이름으로 남아있지만 1989년 이후 힐스보로라는 단어는 영국 최악의 스포츠 참사를 더 강하게 떠오르게 한다.
1989년 4월 15일 FA컵 준결승 시작 시점에 셰필드 웬즈데이의 경기장의 철로 된 펜스로 막힌 테라스에 사람들이 몰리며 96명의 리버풀 팬이 사망하고 수백만 명이 다쳤다.
재판장 테일러 경이 이끌었던 참사 조사는 경찰이 관중 통제에 실패한 것을 주 요인임을 증명했다.
사건은 14:30 BST 즈음부터 펼쳐지기 시작했다. 경기는 같은 경기장에서 리버풀이 노팅엄 포리스트를 상대했던 1988년 준결승의 재판再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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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팬들은 정오부터 경기장에 도착하기 시작했지만, 소수의 노후한 회전식 개찰구를 통해 레핑스 레인에 있는 그들의 지정된 스탠드로 들어가야했다.
일단 들어가서 많은 이들은 파란색 페인트를 칠한 강철 펜스로 둘러싸이고 측면으로 "펜들(pens)"로 구분된 테라스 형태의 아래쪽 스탠드로 들어갔다.
1970년대와 80년대 동안에 관중을 통제하고 경기장 침입을 막기 위해 많은 클럽들이 펜스를 세웠다.
14:50 가량까지 골대 바로 뒤에 있는 3번 그리고 4번 펜은 가득 찼지만 경기장 밖에서 수천 명의 팬들이 여전히 입장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펜들에 공식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2,200명이었다. 3년 전에 설치된 압사 방지 장치가 공식적인 안전 기준에 미달하기 때문에 수용 인원이 1,600명으로 줄어들었어야했다는 게 나중에 밝혀졌다.
14:52에 경찰은 경기장 밖의 사람들의 몰림을 줄이기 위해 큰 출구인 C 게이트를 열라고 명령했다. 2,000 명 가량의 팬들이 이후 경기장에 들어갔고 곧장 3번과 4번 펜으로 이어지는 터널로 직행했다.
이 유입은 펜들에서 심각한 쏠림 현상을 빚었다. 팬들은 옆 펜스 위로 올라가서 상대적으로 덜 붐비는 옆 펜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임시 들것
나중에 3,000명 이상의 서포터들이 중앙 펜들로 입장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안전한" 수용 능력의 거의 두 배였다.
15:00에 경기가 시작되었다. 5분이 지나고 3번 펜의 장벽 하나가 무너져서 사람들이 서로의 위로 쓰러지게 만들었다.
서포터들은 계속해서 주변의 펜스를 넘어 탈출했고, 반면 다른 이들은 안전을 위해 위층에 있는 팬들에 의해 끌어올려졌다.
15:06에 한 경찰관이 경기장 위에 뛰어올라 주심에게 경기 중단을 명령했다. 혼란스러운 이후 상황 속에서 서포터들은 광고판을 뜯어 임시 들것으로 사용했고 부상당한 이들에게 응급 처치를 시도했다.
참사에 대한 책임자들의 반응은 늦었고 잘 조율되지 못했다. 절단 장비를 가진 소방관들은 경기장에 들어가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수십 대의 앰뷸런스가 왔지만 경찰이 "관중 문제"를 보고하는 중이어서 경기장 진입이 지연되었다.
96명의 사망자 중 오직 14명만이 입원할 수 있었다.
1989년 8월 4일의 중간보고서에서 테일러 경은 경찰의 통제 잘못의 핵심 요소는 C 게이트가 열린 후 3, 4번 펜들로 이어지는 터널을 폐쇄하지 못한 것이라고 적었다.
그는 이어서 경찰이 경기장 밖에서 팬들의 혼잡을 다루는 데 실패하고 재난이 펼쳐지는 상황에서 느리게 대처한 것을 비판했다.
그의 가장 강한 어조는 "효율적인 통제에 실패"한 경찰 책임자 총경 데이빗 더큰필드와 "늦게 술취해서" 경기장에 도착했다고 서포터들을 비난하려고 했던 남 요크셔 경찰들에게 돌아갔다.
'사고사'
셰필드 웬즈데이 축구 클럽과 셰필드 시 의회에 비판적인 테일러 보고서에도 불구하고 1990년 8월 14일 기소국장은 증거 부족을 이유로 어떤 개인, 단체 혹은 기관도 형사기소하지 않았다.
희생 사망자들에 대한 1991년 조사는 과반수 의견으로 사고사를 판정했고, 그들이 15:15에 모두 사망했다고 판정했다.
그러나 많은 가족들인 이것에 반론을 제기했고 새로운 조사를 요구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참사에 대한 대중과 언론의 새로운 관심은 1996년 지미 매거번의 다큐멘터리 드라마 힐스보로로 이어졌고, 내무부 장관 잭 스트로는 "증거를 면밀히 조사"할 것을 명령했다.
재판관 스튜어트-스미스 경이 조사나 검사 과정에 제출되지 않은 "새로운" 증거와 또한 명백하게 경찰에 비판적이고 변경된 수십 건의 경찰과 증인 진술서들을 검토하기 위해 임명되었다.
재판관 스튜어트-스미스 경의 결론은 새 증거들이 참사의 이해를 위해 어떤 중요한 내용을 추가시키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진술서들이 편집되어서는 안 되지만 이것이 단순히 "판단 오류"였다는 것이었다.
잭 스트로는 결과를 수용했고 새로운 조사를 거부했다. 그러나 1998년 8월 힐스보로 가족 지지 단체는 private prosecution 형태로 데이빗 더큰필드와 그의 부하 버나드 머리를 과실치사 혐의를 제기했다.
이 사건은 2000년에 재판에 회부되었다. 6주 후 판사는 머리씨에게 과실치사 혐의가 없다고 판결했고, 더큰필드에 대해선 평결에 이를 수 없었다고 말했다.
판사인 후퍼씨는 과반수 평결을 배제했고 더큰필드씨가 공개적인 수모를 당했고, 공정한 재판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근거로 다시 재판하는 걸 거부했다.
2006년에 15세 희생자 케빈 윌리엄스의 어머니인 앤 윌리엄스가 최초 조사 판정에 도전하며 유럽 인권재판소에 사건을 가져갔다.
그녀는 아들이 참사일의 16:00까지도 생존했고 외상질식으로 사망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가족 지지 단체와 캠페인 참여자들은 만약 그 재판소에서 받아들여진다면 영국 정부가 새로운 조사를 하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윌리엄스씨에 의한 청원은 올해 초 10만 명의 서명을 받았고 이는 사안이 의회에서 논의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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