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많은 영화를 봤다. 하나하나 쓸 말이 많아질 수 있는데 비교적 짧게 여러 영화를 본 후의 감상을 적어본다.
Der Baader Meinhof Komplex
영화 초반 독일(서독) 대학생들의 시위 장면, 그리고 이어지는 경찰의 강제 진압 장면은 한국을 연상시켜 섬뜩했다. 냉전의 영향이겠으나 서독에서 그렇게 과격한 무장단체가 오래도록 존속했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다. 이런 단체의 존재를 이제서야 알게 된 건 한국에서 무관심해서인가 정보를 차단했기 때문인가 모르겠다. 바더와 마인호프는 각기 나름의 생각으로 정부에 반기를 들었고, 그들이 감옥에 간 사이 남아있는 단체의 회원들은 리더들의 생각을 잘못 이어받아 더 과격하게 나아간다. 총의 권력. 총으로 상징되는 무력을 독점한 근대국가에 총과 폭탄 테러로 대항하겠다던 그들. 하지만 결국 국가의 승리다. 총살의 결과는 즉각적이었으나 관료제를 너무 만만하게 봤나보다. 누군가 다시 그 자리에 들어와 비슷하게 일을 해낸다. 숫자 싸움에서도 이길 수 없는 게임.
Frost / Nixon
워터게이트로 상징되는 미국 정치사의 수치, 리처드 닉슨. 정치적 고려로 사면받은 범죄자이지만 영국, 호주에서 일하는 쇼 호스트가 그의 스타성을 알아챈다. 그렇게 시작된 둘의 기묘한 만남과 대결 그리고 이해. 방송 카메라라는 무시무시한 권력 도구를 놓고 벌이는 한판 승부. 머리에 든 것보다는 순간적 재치에 의존했던 프로스트는 정치 9단 닉슨의 펀치 세례에 다운되기 직전이었으나, 마음 먹고 한 번 공부를 한 이후 닉슨을 때려눕혔다. 사람의 일관성이란 게 참 중요하긴 하다. 요즘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를 보면. 하지만 닉슨을 평가할 때 그래도 60%는 아주 잘 한 일이었다고 보편적으로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워터게이트 하나만으로 그를 수치스러운 인간으로 낙인을 찍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영화는 던지고 싶었던 걸까. 우리는 보통 남들에 대해서 더 높은 도덕 기준을 부과하기 마련이니까.
Before Devil Knows You're Dead
제목이 포함된 대사가 나왔던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무슨 의미일까. 여하간 한 가족의 비극이 너무나 참혹하게 그려진다. 부모의 보석상을 털자는 계획을 세우는 두 아들? 작은 아들이 끌어들인 녀석이 어머니를 살해? 동생이 형수와 바람? 동생은 이혼하고 돈도 없어? 아버지가 두 아들의 범죄를 알아채고, 결국 큰 아들 질식시켜 죽임? 사실이라면 정말 가슴아픈 일이다. 작은 악, 약간 쉽게 문제를 해결해보겠다던 얕은 꾀가 결국 진짜 악마를 불렀다. 이젠 정말 에단 호크의 아저씨 연기가 어색하지 않단 말인가.
Revolutioary Road
아주 재밌는 동네 이름이다. 혁명적인 길. 꿈에 가득찬 한 부부가 파멸하는 길. '중산층 가정의 위기'라는 영화에 대한 설명을 보고 봤더니 너무 그런 틀로 보여서 불만이었다. 영화에 대한 정보를 얼마나 알고 봐야 가장 재미가 있을런지. 부부의 혁명적인 삶의 방식(비록 이루지도 못하고 파국으로 치닫았지만)은 정신병원에서 나온 미치광이 이외 누구의 동의도 얻지 못한다. 누가 미쳤는가? 이건 현대 도시인의 삶 전체에 던지는 질문이다. 아무도 다수가 미쳤다고는 하지 않는다. 원래 미친 것의 정의는 다수가 내리는 법이니까. 갑작스런 승진의 유혹, 덜컥 생긴 아이가 파리에서의 혁명적 삶을 가로막았다. Tricky하고 해결하기 힘든 과제다. 행복은 우리 주변에 널려있잖아요! 파랑새는 여기 있어요!라는 유혹의 속삭임. 파리 자체가 이상향이 아님은 둘다 잘 알고 있었다. 문제 해결보다는 고민해보라는 감독의 메시지리라.
Outlander
얼핏 포스터만 보면 완전 공상 영화같았는데 막상 보니까 바이킹에 대한 얘기다. 특이한 것은 카비젤로 대표되는 어떤 (아마도) 외계 문명과 조우하며 일어나는 사건이 개입한다는 점일 거다. 바이킹 사회 역대 최고의 위기가 외계 세력 즉 아웃랜더와 함께 들어온 괴물에 의해 발생하는데 이를 바이킹들과 카비젤이 합심하여 해결. 모든 문제가 해결된 후 아웃랜더로 상징되는 외세는 다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으나 바이킹 세상에 남아 자신이 저지른 혼란을 수습하고 책임지기로 한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낯선 문화가 조우하여 우수한 문화의 지도자가 다른 문화의 지도자로 변신하는 건 꽤 일반적인 일이었다. 바이킹 신화에 있는 내용인지 모르겠으나 그렇다면 베오울프류의 영화라 할 수 있겠다.
Defiance
포스터와 얼핏 본 예고편에서 예상한 내용과 완전히 다른 영화였다. 배경도 독특한 벨라루스의 유태인 집단. 독일군을 피해 숲속에 새로운 생활공간을 창조한 그들. 약간의 약탈(?)과 절약으로 살아가지만 집단의 인원이 커질수록 문제가 불거진다. 리더였던 형제는 갈라서서 동생은 러시아군과 함께 저항운동을 편다. 독특한 역사적 사건을 간접체험할 수 있고, 흔들리지 않는 리더의 큰 힘을 느낄 수 있었지만 왠지 더 이상의 느낌은 적기 힘들어지는 애매함이 남는다.
Inkheart
책을 소리내어 읽으면 책 속의 주인공들이 뛰쳐나와 읽은 자의 삶을 망가뜨린다는 어찌보면 섬뜩한 이야기다. 단순한 오락적 즐거움보다 내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영화의 설정 자체가 주는 함의다. 글을 써본 사람은 누구나 느끼겠지만 내가 연필로 종이에 쓰건, 컴퓨터 화면에 적건 그 글들은 단순히 선의 조합이 아니라 나와 별개의 존재가 된다. 때로 그들은 스스로 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 격인 작가를 위협한다. 나는 왜 이 모양이냐, 내 운명을 바꿔달라. 예전에 Ober라는 비슷한 설정의 영화가 있었다. 그 영화를 볼 때도 느꼈지만 책 속 인물과 작가의 관계는 인간과 신의 관계와 대응하는 것이다. 우리는 푸념을 할 뿐이고, 신은 당혹스러울 뿐이다.
The Wrestler
미키 루크. 섹시 배우의 대명사가 이렇게 망가질 줄이야. 여성들을 달뜨게 하던 그 미남자는 한물간 프로레슬러로 근근이 살아갈 뿐 아니라 몸을 아끼지도 않는다. 덕분에 그의 온몸은 상처투성이로 피를 흘려대고, 그 몸은 결코 섹시하지 않다. 기껏해야 그는 여자화장실에서 싸구려 섹스를 할 뿐이다. 대형마트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싶어도 예전 모습을 기억하는 팬들의 시선 때문에 때려치우고 만다. 은퇴를 하면서까지 얻고 싶었던 딸의 마음을 되돌리는데 실패하며 그는 프로레슬링 경기장에서 죽어가는 것이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기에. 그곳만이 그가 살아갈 수 있는 곳이기에. 하지만 그 쇼 무대는 우리가 흔히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부르는 곳이 아니던가. 그는 진정한 삶을 살지도 못하고 가는 것인가? 아니 우리 모두가 그런 것인가?
Doubt
마지막 메릴 스트립이 내가 그런 의심을 품었어라고 계속 외치는 부분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작년의 좋은 영화 중 하나로 꼽히기에 봤는데 확 와닿는 무언가가 있지는 않았다. 아마도 남색을 즐기는 듯한 신부와 그를 내몰려는 수녀들의 대결? 단순히 별거 아닌 영화로 치부할 수는 없지만 영화의 가치를 잘 알아보지 못하겠다.
Lions for Lambs
다우트와 마찬가지로 메릴 스트립이 등장한 영화. 최근 그녀의 영화들은 최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최상도 아니다. 이 영화가 거대한 실패작이라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막상 보니 정말 다우트보다 더 이해가 안 된다. 중간 이후엔 대충 보기까지 했다. 하도 모르겠어서 다른 영화평을 조금 읽어보니 하나의 사건을 여러 사람이 어떻게 보느냐를 비교해보라는 말을 하더만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로버트 레드포드의 정치 영화라는 평이 많던데 다시 보고 나서 판단해야겠다.
용의자 X의 헌신
화제의 일드 갈릴레오의 후속 영화다. 그래서 너무 익숙한 인물과 익숙한 사건 해결 방식 때문에 새롭다는 느낌을 받진 못했다. 드라마를 '영화적'으로 잘 각색한 것 같긴 하다. 드라마의 전개방식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영화가 초반부터 살인자를 명확히 드러내놓고 시작하기 때문일까 누가 범인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실제 범인을 도운 옆집의 천재 수학자는 어떻게 사건을 은폐했는가 그리고 궁극적으로 왜 옆집 아줌마의 살인을 도왔는가가 문제가 된다. 결국 자살하려는 그에게 삶의 희망을 줬다는 건데 실제 상황이라면 꽤 큰 이유지만 영화로 만들기엔 좀 약한 설정이 아닌가 싶다.
Bride Wars
이런 영화는 가볍게 보고 넘기면 되리라. 출발 비디오 여행에서 대강의 내용을 봤기에 마지막 10여분을 빼면 볼 것도 없었는지 모른다. 자매 이상으로 친한 두 친구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결혼하게 되면서 겪는 갈등과 쪼잔한 다툼의 끝은 무엇인가, 어차피 화해할테니까 어떤 방식이 될 것인가가 문제였을 뿐이다. 결혼식 자체가 난장판이 된 건 어쩔 수 없었는데, 그 해결책으로 한 커플은 결혼식장에서 이별했고 대신 다음 해에 친구의 동생(오빠?)과 결혼하여 더 끈끈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방식을 내놓았다. hahah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