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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 축구

저주 받은 수아레스를 위해

by wannabe풍류객 2012.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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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중요한 일이 있어 리버풀의 맨유 어웨이 경기를 보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전반 20여분을 봤고, 한참 후에 스마트폰으로 리버풀이 2-1로 지고 있다는 걸 확인한 이후 경기 종료 직전 5분 정도를 시청할 수 있었다. 경기의 나머지 부분은 낮에 TV의 하이라이트 판으로 봤지만 이미 팀이 패한 것을 알았고, 다른 팬들의 반응으로 어떤 경기를 했을지 대강 짐작이 되었기에 확인하는 차원일 뿐이었다.  

맨날 하듯 오늘도 영국 언론들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스카이 스포츠의 리포터는 소위 '수아레스의 악수 거부' 사건에 대해 케니 달글리쉬에게 집요하게 물어보며 리버풀 감독을 화나게 만들었고, 맨유 감독은 건방지게도 남의 클럽의 선수를 팔아야한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메이저 언론에서 케니가 지속적으로 수아레스를 감싸는 태도를 문제삼았다. 이 지긋지긋한 수아레스의 인종차별 논란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 '수아레스 인종차별 발언' 핵심 사안들

이 일에 대한 글은 그만 쓰려고 했지만 회원수 많은 축구 커뮤니티에서 잘못된 사실이 넘쳐나 진실로 여겨지는 상황을 확인하고 감히 다시 적어보려고한다. 

▷ 니그로가 아니라 '네그로'

이 사건에 대한 반응을 보며 제일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많은 한국인들의 영어 제국주의다. 역사적 흐름이 한국을 미국에 의존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영어가 여전히 한국인들의 등급을 가르기도 하는 잣대로 작용하고 있다. 징계위원회의 보고서는 물론 수많은 언론에서 10월 두 클럽의 경기에서 두 선수가 '스페인어'로 대화를 했음을 그렇게 강조함에도 많은 사람들은 수아레스가 에브라에게 '영어 단어인 니그로'라고 말했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 물론 negro의 철자는 같고 발음이 다르다. 그럼 그게 그거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영어권에서의 니그로가 스페인어의 네그로보다 훨씬 비하적이고 공격적인 단어다. 스페인어에서 네그로는 기본적으로 검은 색을 칭할 때 쓰는 말이고 사람에게 쓸 때 언제나 공격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즉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아레스가 '니그로'라고 말했다, 혹은 심지어 이 '니그로=니거'라고까지 생각하는 사람을 보며 안타깝지 않을 수 없었다. 위원회의 보고서에는 이제 에브라도 수아레스가 '니거'의 의미로 네그로라고 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고 적혀 있다. 피해자마저 그런데 왜 남들이 그가 더 상처를 받은 것처럼 생각하나?

에브라는 10월 경기 중에 수아레스와 그토록 대화를 하고 싶어 수아레스가 잘 못하는 영어 대신 친절하게도 스페인어로 말을 걸어왔다. 그러면서 스페인어의 심한 욕도 할 줄 알던 에브라는 '네그로'를 '니거'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상식에 반하는 일이다. 스페인어로 말하면 스페인어의 차원에서 사고해야지 왜 하필 네그로라는 말만은 영어적으로 수용했나. 물론 에브라 버전의 수아레스의 인종차별 발언'들'을 인정한다면 스페인어였음에도 수아레스의 말이 상처가 될 수도 있었겠다. 에브라 버전이 맞다는 확실한 증거는 전혀 없다는 것이 문제지만.

수아레스 비난자들의 전가의 보도 중 하나는 로마법을 들먹이는 것이다. 유럽에서 선수 생활을 하니까 당연히 '니그로'가 인종차별적인 말인 걸 알아야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우루과이에서 네덜란드로 이적해서 몇 년을 보내고 리버풀로 이적한 것이니 더욱 그렇다는 주장이다. 우선 수아레스는 '네그로'라고 말했으므로 전제부터 틀렸다. 또 네덜란드에서 'negro'라는 말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알고서 수아레스를 비난하거나 말거나 해야 할텐데 그렇게까지 하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다. 사실 네덜란드엔 유사 단어가 있을 뿐 정확히 같은 말은 많이 사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설상 같은 단어가 사용되더라도 뉘앙스 차이라는 건 언제나 존재한다. 이런 점에 대답하려면 네덜란드어 전공자가 등장하셔야 할 것이다. 

한국인이 어떻게 어떤 외국인이 자신의 고국이 아닌 곳에서 한 일을 두고 그렇게 모든 걸 다 안다는 듯이 말할 수 있을까. 그 오만이 두렵다. FA가 수아레스를 본보기로 삼으며 존 테리 사건을 더욱 처리하기 힘들게 만들고 큰 대회를 불과 몇 달 앞두고 대표팀 감독을 내모는 악순환에 빠지지 않았나. 수아레스는 '네그로'라고 말했다고 처음부터 말했다. 다만 잉글랜드 사람들 혹은 영어에만 너무 익숙한 한국인들이 오해하기 쉬운 것처럼 '니거'의 의미로 말했던 건 아니다. 에브라도 이 점에 대해선 오해를 풀었다. 다른 분들도 오해를 푸는 게 어떨까. 



▷ 수아레스가 인종주의자?

어제 경기에서 수아레스가 맨유의 또 다른 흑인 선수인 발렌시아에게도 인종차별적인 무언가를 했다는 주장들이 있는 모양인데 아직 눈으로 확인을 못 했다. 이제는 수아레스가 일회성 인종차별 발언을 한 사람이 아니라 아예 인종주의자라고 단정하는 움직임도 있는 모양이다. 리버풀에 흑인 선수 글렌 존슨이 있고 그는 수아레스를 시종일관 지지했다. 수아레스는 흑인 선수들이 있는 아약스에서 주장이었고, 현재 네덜란드 시절의 흑인 동료들도 그를 지지한다. 우루과이 쪽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사람들이 모두 이해관계 때문에 수아레스를 지지하는 척 하는 걸까? 인종주의자라는 낙인을 그렇게 쉽게 찍어도 될까? 

여러 번 말했지만 그는 애당초 흑인을 비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할아버지가 흑인이었다. 라틴 아메리카는 혼혈이 워낙 진행되어 피부색이 다른 사람을 보는 것이 당연하다. 국민적 축구 영웅의 별명에도 '네그로'라는 말이 들어간다. 수아레스 부인은 수아레스를 '네그로'라고 부른다. '네그로'라고 불리는 사람이 누가 봐도 흑인이 분명한 에브라에게 '네그로'라고 말했다. 이건 어찌 보면 유사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간의 대화였다. 물론 수아레스도 에브라의 피부색이 자신보다는 훨씬 어두운 걸 지칭해서 그를 '네그로'라고 불렀을 것이다. 여기에 어떤 비하의 뉘앙스가 없었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이것은 백인이 흑인에게 하는 인종차별과 같은 수위일 수 없다. 이런 말까지 하면 유치할지 모르겠으나 요즘 수아레스를 볼 때마다 이 친구가 언제부터 이렇게 피부색이 검은 편이었나 궁금할 정도다. 피부색이 약간 검은 사람이 더 검은 사람에게 '네그로'라고 했다. 약간 비약하자면 흑인끼리 상대방을 흑인이라고 말하는 건 그냥 농담 혹은 욕을 하는 거지 인종차별은 아니다. 두 선수는 남아메리카인과 흑인으로 서로를 다른 범주에서 자신과 구별지으려고 했지만.

 
□ '악수 거부 사건'과 현인 존 반스

예상대로 어제 경기가 있은 후 대부분 언론의 헤드라인은 수아레스의 악수 거부가 장식했다. 앙리가 골을 넣으며 아스날과 아름답게 이별하고, 잉글랜드 감독이 되기 직전인  해리 레드냅의 토트넘이 상위권의 뉴캐슬을 대파하고, 에버튼이 첼시를 잡으며 아브라모비치의 경고를 들은 비야스 보아스가 더 움츠러들고, 두 승격팀의 대결에서 홈팀인 스완지가 패하고, 악동 테베스가 맨시티 경기에 다시 나설 듯 하며, 한국의 관심사를 보면 박주영은 또 명단에서 제외되고, 박지성은 맨유 200 경기를 넘긴 것을 축하받나 했으나 벤치에서 박수만 쳤고, 지동원은 그나마 경기에 교체 선수로 들어갔지만 이런 굵직한 이슈들은 고작 악수 사건 하나로 다 별 것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역시나 이번 사건도 리버풀 팬들의 의혹의 대상이 되었다. 수아레스가 손을 내미는 와중에 에브라가 자신의 오른손은 슬쩍 내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짧은 순간, 그리고 빨리 경기를 시작해야하는 와중에 '어, 나랑 악수 안 할 건가'라는 생각에 수아레스가 그냥 지나치고 다음 선수와 악수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에브라가 나중에 수아레스 팔을 잡은 걸 보면 악수할 뜻이 없지는 않은 것 같은데, 처음에 왜 손을 내렸는가를 생각하면 모든 게 수아레스를 엿먹이려는 계략인가 싶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건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제 경기에서 두 선수가 악수만 했다면 둘 사이의 문제가 다 해결될 것처럼 말하고 글을 쓴 건 참 이상하다. FA가 8경기의 징계를 내린 상황에서 이미 수아레스는 치명상을 입었다. 그렇게 큰 피해를 입힌, 그러나 인종차별적 말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에브라와 악수 한 번으로 모든 걸 깨끗이 잊을 수는 없다. 수아레스가 보기에 에브라는 그다지 큰 일도 아닌 것을 처음부터 과장해서 언론에 터뜨린 사람이다. 설령 어제 악수를 했더라도 좋은 감정을 가질 수는 없다. 또 인종차별 발언의 진실이 무엇이건 에브라도 수아레스에 대한 악감정을 악수만으로 거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언론들은 왜 그렇게 악수에 집착했나. FA의 캠페인이기 때문이고 또 프리미어 리그의 '이미지'가 걸렸기 때문이다. 비에이라, 킨, 네블이 얽힌 그 유명한 맨유와 아스날의 하이버리 터널 사건이 있던 경기에서도 맨유 선수들이 악수를 거부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랬던 것이 지금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영국의 현재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FA는 축구에서 온갖 차별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경기 전 악수를 하는 것도 그런 차원이다. 그런데 QPR의 안톤 퍼디난드와 첼시의 존 테리가 맞붙게 되자 FA는 논란이나 충돌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그 경기 전의 악수는 생략했다. 어제 맨유와 리버풀의 경기, 수아레스가 복귀하고 처음으로 에브라와 대면하게 될 이 경기에서 두 선수가 어설픈 입장일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가능했다. 그런데 양팀 감독들이 선수들, 특히 문제의 두 선수가 악수를 기꺼이 할 것이라고 말하며 FA도 굳이 악수 행사를 취소하지 않았다. QPR의 경우 그 팀 선수들이 모두 악수를 거부하겠다는 입장이었던 것도 어제 경기와 차이점이다. FA로서는 이번에도 악수가 취소된다면 앞으로 행사를 지속하는 의미가 없어진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에브라의 계략이건 수아레스의 거부감이건 어제 두 선수의 악수는 성사되지 않았고, 터널에서의 다툼, 경기 후 에브라의 도발로 사태는 악화일로였다. 아마 에브라는 인종주의적 모욕도 하고 악수도 안 하는 수아레스를 보기 좋게 꺾었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맨유 팬들에게 아름답게 보였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 더욱 좋지 않았다. 심지어 퍼거슨도 경기 종료 후 에브라의 폴짝거림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야한다고 말했다. 잉글랜드 언론의 축구 담당 기자들은 프리미어 리그가 살아야 자신들의 직장이 유지되기 때문인지 프리미어 리그의 PR을 매우 중시한다. 그래서 진실의 여부보다도 잉글랜드 축구에서 아름답지 않은 일이 발생하더라도 금세 처방이 이루어진다는 걸 강조하고 싶어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단아 수아레스는 계속 언론의 표적이 된다. 수아레스를 리버풀에서 내쫓으라는 퍼거슨의 말은 어찌 보면 프리미어 리그라는 거대 산업의 공동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 산업의 최대 기업의 운영자가 실력이 좋기는 하겠으나 현재의 위치 때문에 언론의 지지를 더 받게 되는 것도 이해 못 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이 언론-기업 복합체에 그나마 현인이 하나 있으니 그는 전 리버풀 선수이자 흑인 선수로서 지금보다 훨씬 심한 차별 대우를 당했던 존 반스다. 어제 악수 사건에 대해 모두가 큰 일이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 때 반스는 정확히 핵심을 찌르는 말을 한다. "악수는 보여주려고 하는 거잖아요." 악수는 쇼에 불과하다. "우리는 도덕의 수호자가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세계에서 더 나쁜 일들이 벌어지고 있고, 이 나라에서도 더 나쁜 일들이 벌어져요. 모든 걸 축구 선수에게 짊어지울 수는 없어요." 세상에는 차마 글로 적을 수 없는 온갖 흉악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수아레스가 다시 없을 악당인양 저주한다. 

반스는 악수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이런 견해를 보인다. 수아레스가 악수를 거부했다면 악수 상황 직전에 마음이 바뀌지 않았을까, 이 문제를 클럽과 분명히 상담했을텐데[주: 케니 인터뷰에 따르면 분명히 수아레스는 하기로 했다] 악수 하기 싫었다면 싫다고 했어야 하고, 리버풀은 악수 행사가 열리지 않도록 노력했어야한다는 것이다. 또 경기 종료 후 맨유의 에브라의 행동과 퍼거슨의 인터뷰 모두 수아레스의 일과 함께 클럽 PR로서 좋지 않은 것들이었다고 평한다. 반스도 ESPN에서 일하므로 업계 밖의 인물은 아니다. 그래서 PR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악수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말할 정도의 판단력이 있는 많지 않은 사람 중 하나다.

잉글랜드 언론이 원한 건 그리고 아마도 FA나 프리미어 리그도 원한 것은 생색내기다. 언론들이 리버풀 감독 케니 달글리쉬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진단을 내리지만 오히려 언론 자체가 잉글랜드 축구 산업을 유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여론을 호도하고 있다고 진단을 내릴 수도 있다. 하기 싫은 악수를 안 한 것이 왜 문제인가. 에브라가 먼저 거부한 것이건, 수아레스가 줄구장창 거절한 것이건 둘 모두 하기 싫었던 게 당연하지 않나. 잉글랜드 축구계에 탈세가 빈번하고, 축구선수들이 일반인은 꿈도 꿀 수 없는 거액의 연봉을 받는 게 더 큰 문제 아닐까? 선수들의 도박, 음주, 자살 문제 등 악수보다 심각한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아마 대부분의 한국 EPL 팬들에게 이런 건 관심사가 아닐 것이다. 나는 관심은 있으나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들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알 것 같다.

리버풀 에코가 어제 경기 직전의 칼럼에서 말하듯 맨유는 리그 우승을 노리는 팀이고 리버풀은 4위를 목표로 하고 있다. 두 팀은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 물론 각자의 목표를 위해 가능한 많은 승점이 필요하다. 리버풀과 맨유의 경기는 역사가 너무 깊고 특히 이번 시즌은 두 선수의 일화 때문에 경기 자체나 승점보다 다른 일로 더 화제가 되고 논란이 되어 안타깝다. 두 팀이 이제 올 시즌에 더 만날 일이 없다는 게 작은 위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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