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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야기 - 이영훈 지음/기파랑(기파랑에크리) |
큰 얘기부터 하자면 책은 '민족'과 '과거'의 망령을 벗어던지고 살아있는 우리 '개인'들의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가치를 '자유'로 파악하고, 서유럽에서 시작된 근대 문명의 물결이 한국에 다다른 것을 축복하고 제도 차원이 아닌 정신 영역에서 진정한 문명인이 되어야 선진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민족을 거부하기는 워낙 어려운 터라 처음에 이런 저자의 주장을 듣고는 "어라? 생각이 좀 있는 사람이네. 단순한 보수꼴통은 아니구나"라고 평가를 달리하게 된다. 특히나 요즘은 민족주의에 대한 강의를 듣는 터라 저자가 어떻게 민족주의를 뛰어넘는지 주목하게 된다. 한국의 민족은 20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주장을 통해 '상상의 공동체'이자 서구 기원인 민족주의 논의에 충실한 듯 보였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국가라는 공동체를 만들려는 운동의 차원이라는 점을 본다면 결국 저자의 논의는 대한민국이 생겨난 1948년에 한국 민족(혹은 대한민국 민족)이 비로소 탄생했다는 결론으로 갈 수도 있는데 저자는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같은 이념과 가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결사체 수준의 국가를 만들어내는 차원으로 본다면 대한민국과 북한은 다른 민족이라는 해석으로 몰아갈 여지는 충분하다. 내가 보기에 그런 해석도 가능하지만 저자는 자기검열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면서 책 전체를 통해 욕을 덜 먹기 위한 자기검열을 하고 있다. 그것도 정신적, 육체적으로 상처받기 쉬운 인간으로서 이해가능한 대응이긴 하다. 나쁘게 말하면 자기검열이지만 독자를 의식하지 않고 쓰는 책이 얼마나 되랴.
이영훈 교수는 건국절을 만들자고 처음 제안한 분이라고 한다. 또 난 잘 기억하지 못했지만 100분 토론에서 군위안부 문제로 홍역을 치른 분이다. 책에서는 이런 내용들을 비롯하여 친일파 문제 등 현 정부들어 논란이 불거지는 문제들에 대한 저자의 입장이 정리되어 있다. 건국절 얘기는 윗 문단에 쓴 내용으로 갈음하고, 친일파 청산에 대한 저자의 입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광수를 예를 들며 황국신민화에 앞장선 악질 친일파가 일부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친일파로 분류되는 사람의 상당수는 단지 생계를 위해 하급 관료로 일제의 기관에 일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근대 문명과 행정 실무를 익힌 테크노크라트들이 이후 대한민국에서 그대로 일을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고 오히려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일제 시대의 법과 제도가 상당 기간, 심지어 지금까지도 이어진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이 정도론 미진했는지 어떤 시각으로 보는지에 따라 평가가 엇갈리는 과거 평가를 법으로 정해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부당하다고 재차 강조했다.
일제 시기 수탈론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한국 역사 교과서의 좌편향 주장과 괘를 같이 한다.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은 일제 때가 행복한 시절은 물론 아니지만 그 시절을 더 비참한 시각으로 보게 된 것은 사회주의 혁명을 신봉하는 역사학자들의 산물이라고 한다. 더 정확히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여섯 권의 해악이었다는 것이다. 그 책들을 읽지는 않았지만 저자의 설명을 들으면 학문적 엄밀성의 차원에서 문제가 있어보이긴 하다. 학문적 엄밀성, 문서라는 물증은 저자가 내세우는 전가의 보도이자 양날의 검이기도 한데, 적어도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일정한 힘을 가진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역사란 그리 단순하지 않기에 일제 권력을 억압자이자 민족 말살자로 간단히 재단해버릴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소위 "재인식"(이 책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의 해설서의 성격이다)의 논문들이 객관적인 데이터의 힘으로 좌편향이었다는 그간의 역사 연구를 바로잡는데 약간은 기여했음을 인정할 수는 있지 싶다. 여하간 한국에서 나온 쌀의 4~50%를 일제가 그냥 뺏어갔다는 수탈론은 아무 근거가 없고, 오히려 돈 주고 사갔으니 수출을 한 것이라는 것이 대략의 주장이다. 그런데 수출이라면 누가 사고 누가 판 것인지, 식민지 조선에서 농산물을 판 댓가를 얻어 이익을 얻은 것은 누구인지 궁금한데 그 점에 대한 설명은 없는 것 같다.
내가 위안부라는 개념을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시절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통해서였던 것 같다. 역사적 비극과 성적 착취라는 미묘한 영역은 욕망과 동정의 감정을 동시에 일으킨다(위안부는 남성 군인의 일방적 입장이 반영된 매우 부적절한 용어지만 문헌으로 통용되는 단어라 어쩔 수 없이 쓰지만 따옴표를 친 '위안부'로 표기한다는 어떤 분의 주장이 적절해 보였다). 이 부분에 대한 책 내용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정신대와 '위안부'가 완전히 다르다는 내용이다. 정신대는 성적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일제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노동력을 동원한 것을 말하는 것이고, 심지어 여성정신대는 한국 지역에서 시행된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90년대에 나온 정진성 교수의 글을 보거나 (이차적으로 접했지만) 위안부로 끌려간 할머니들의 증언에서도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한다는 걸 보면 저자의 말이 반드시 맞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몇 가지 글을 추후에 읽어보면 정신대와 군위안부가 일단은 다른 개념인 건 맞는데, 식민지 조선에서는 사정이 달라서 혼동할만한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저자가 가장 구설수에 오른 건 100분 토론에서의 사건 때문인데 그 홍역을 치른 후의 고통과 좌절감이 책에 진하게 배어 있다. 약간은 이성적으로 토론을 다시 보기한 사람들은 진보 진영이라도 저자의 말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대목에서는 남성, 군대 중심의 문화의 폐해를 고쳐보자는 주장이 타당하기도 하다. 추후에 생각할 문제는 자발적 성매매의 영역, 기업형 위안소, '순결한 처녀'와 훼손된 민족성의 관련성 등이다. 어젯밤에 군위안부에 대한 글을 몇 개 봤는데 확실히 이 부분은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이라는 보편적이고 아주 오래된 문제에 식민지 조선이라는 특수 영역을 입체적으로 봐야하는 측면이 있다. 저자가 좋아하는 물증이 너무 적어서 애매함이 넘치고, 누가 누구에게 사과해야할지 어떻게 보상이 가능할지 알아갈수록 막막해진다.
살아가려면 개똥 철학이라도 필요하고, 논리를 펼치려면 근본적인 가정이 필요하다. 저자의 경우는 '개인의 자유'가 가장 기본 가정이다. 개인의 자유가 존중되고 신장되는 것이 제일 가치가 되면서 부정적으로 보이던 다른 영역의 문제는 사소한 것이 되어버린다. 경제학에선 너무 당연한 것인지 모르지만 개인의 자유가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밝히지 않고서는 저자의 모든 논리도 좌편향 민족주의 지상주의와 비근한 근본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위험이 대안교과서라는 현실이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자유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평등의 가치는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는 것일까?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은 분명 정치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 있지만 그간의 상당수의 역사적 비극을 불가피한 일로 치부해도 되는 걸까?
책은 EBS에서 강의하기 위한 원고에 살을 붙인 것이라 쉽게 쓰여졌고, 엄밀한 의미의 학술 서적은 아닌데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들과 다른 결정적인 주장들의 근거가 제대로 제시되지 않는 부분이 종종 있어 아쉬움이 크다. 이 책을 계기로 뉴라이트 계열의 역사학자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볼 가치는 있음을 알게 되었고, 한편 그들의 잘못된 주장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도 더 과학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할 필요성도 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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