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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집 '학'의 나머지 부분들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학'에 이어 배치된 소설은 '청산가리(1948.8)'다. 병아리를 닭으로 길러내던 학교 선생이 닭의 죽음을 자꾸 목격하며 원흉인 고양이를 죽이기 위해 청산가리를 사용하려는 마음을 먹는 이야기다. 얼마 전 '길티'였던가 드라마에서 학교에서 청산가리를 훔쳐 범행에 이용하는 이야기를 봤는데, 이 소설을 보니 학교는 청산가리의 전통적인 공급지였음을 재확인한다. 주인공은 외국 작가의 작품에서 청산가리의 사용법을 '배웠다.'
그러나 주인공은 고양이가 청산가리를 먹고 죽어있을 모습을 보기 싫어 실제 사용은 주저한다. 그러는 틈에 닭은 또 죽어나가고 절대악과 같은 고양이를 처단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힌다. 결심하는 선에서 소설은 끝나는데 이 흐름이라면 진짜로 청산가리를 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인격을 대입시킬 수 없는 고양이에게 범죄의 혐의를 씌워 처단하는 것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농작물을 재배하는 농민이나 무언가 기르는 축산업자가 질병이건 해충이건 야수건 대처하며 싸워나가는 건 일종의 숙명이다. 업이 아니지만 닭을 기르기에 더 예민해진 것일까? 청산가리라는 맹독을 써서 고양이를 처형하겠다는 심사는 단순한 처벌의 심사는 아닐 것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참외(1950.10)'다. 한국전쟁이 한창일 시기에 발표된 소설이다. 이야기 자체가 피난에 대한 내용이다. 피난 통에 화자의 어머니는 손자들을 위해 남의 밭의 참외를 따왔다. 아들인 화자는 안 그러던 어머니의 행동에 너무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직은 전쟁의 초반이었던 50년 10월. 유례없는 현대전의 처참함은 갈수록 커질 터였으나 이 예외적 상황을 화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다음은 제목 자체가 '부끄러움(1954.12)'이다. 이야기는 피난 중 부산에서 지인들과 이야기를 하던 화자가 20년 전 딸의 죽음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한 지인은 새끼곰 잡는 '기막힌' 이야기를 했고, 그것을 듣던 화자는 딸을 무력하게 죽게 만든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떠올린다. 1930년대 초중반의 일일 것이다. 홍역이라면 요즘엔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어떻게 대처할지 몰랐던 화자와 아내는 전통적인 방식부터 현대 의학까지 중구난방으로 찾으며 치료 방법을 모색했으나 아무 것도 모르기에 시간만 허비하고 딸을 죽게 만들었다. 자신이 새끼들의 생명을 죽일 수 있는 무거운 돌을 들고 있다는 걸 잠시 잊은 어미곰의 실수처럼 딸의 생명을 놓쳐버린 부끄러움.
몰이꾼(1948.3). 이것도 꽤 우울한 이야기다. 애놈, 깍쟁이놈들로 지칭되는 가난한 소년 중 한 명이 하수구 속에서 살해당하는 이야기. 구조적 요인으로 가난에 빠져들었을 아이들은 온갖 사회악의 원흉으로 지목되고, 사람들은 언어를 통해 총을 이용한 살해가 마땅하다고까지 말한다. 결국 소년의 의도적인 계획에 의해 익사 당한다. '한갓 검부러기모양'으로 하수도구멍에서 나오고 만다. '청산가리' 직전의 소설인데 사회가 굉장히 살벌하고 긴장이 고조된 상황임을 짐작케 한다.
매(1952.10). 성적 호기심에 대한 이야기일까? 소년은 왜 유독 써커스단의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매일 보러 갔을까. 써커스단에서 나이가 비슷한 것은 소녀뿐이었기 때문에 감정의 교류가 잘 될 거라 믿었을까. 아니면 이 이야기는 저항도 못하고 어른의 매를 수없이 맞으며 연습한 결과 그 아슬아슬한 물구나무 서기를 해내게되는 어린이의 상황을 통해 사회 분위기를 말하고자 함일까. 소년은 집에서 매맞는 아이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소녀가 맞는 것을 보며 소년은 서커스 보러갈 돈을 마련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좀도둑질을 한 자신을 때려달라고 아저씨에게 요청한다. 그렇게 매를 맞으면 자기도 공부가 되었건 딱지치기가 되었던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믿은 것일까?
여인들(1948. 9).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해야 하는 한국 남성들을 살려내는 여인들의 온갖 기발한 방법들을 자못 비장하게 그린 세 가지 에피소드 모음. 순간에 목숨이 좌우될 상황에 기지가 발휘되고 부끄러움은 잠시 잊혀진다.
사나이(1953. 9). 이것은 사나이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자를 믿지 말라며 신혼 부부의 가운데에서 매일 자는 어머니 덕에 부인을 만져보지도 못하고 애만 태운 김서방이 몸으로 도발하는 여자들에게 농락당하는 이야기들이다. 나약한 남성성?
두메(1952. 8). 평양손님의 유혹에 넘어가 남편 작대영감을 살해하는 칠성네. 숯귀신의 운명.
필묵장수(1955. 4). 재능없는 그림 실력을 가진 필묵장수 서노인. 이십 년을 서화를 익혔지만 개화와 해방 공간에서 갈수록 자리가 없어졌다. 죽음이 머지 않은 6.25 직전에 필생의 역작(이라고 자신은 생각하는)을 그려냈고, 버선을 선물했던 여인에게 선물하려 했으나 그 마을은 폭격에 파괴되었다. 천대받던, 몰락한 양반에 대한 마지막 동정?
과부(1952. 12). 소년과부. 소녀과부의 오기인가 했으나 시집와서 곧 어린 남편을 잃은 부인을 이르는 이런 말이 있는 모양이다. 한씨부인과 박씨부인이라는 두 과부의 이야기. 한씨는 남편과 살아보지도 못하고 과부가 되어 남자를 싫어하며 멀리한 것을 자랑으로 삼았고, 박씨부인은 남편가 잠깐 살긴 했으나 곧 잃었다고, 어떤 남자의 아이를 임심했다가 아들과 남자를 떠나보내고 시부모 곁에서 살아갔다. 먼 훗날 모자는 상봉했으나 박씨부인은 차마 자기의 정체를 고백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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