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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시절의 라파엘 베니테스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경우도 흔치 않은 것 같다. 보통 감독이 떠날 때는 때가 되었기 때문이라 아쉬움이 있더라도 선선히 보내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실상의 경질이었던 이번 라파의 계약 해지를 두고 떠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보냈다는 평가가 여전히 팽배하다.
라파의 마지막 경기
차근차근 접근해보자. 지금 이 시점에서 라파를 보내는 것이 옳은 것인가.
통상적 관례로 보아 그는 클럽에서 진작에 해임이 되었어야 했다. 클럽 수뇌부와 더 이상 일할 수 없다는 뜻을 여러 번 전했고, 클럽의 구단주, 이사들에게 불만을 많이 표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란의 격랑에 빠진 '지금' 라파만한 감독을 데려오기 힘든 것이 뻔한 데 왜 해임하느냐고 한다. 라파에게 보상금으로 6m 파운드나 되는 거액을 지불하고 새로운 유능한 감독 영입을 위해 수백만 파운드를 추가로 지불하면 왠만한 좋은 선수 하나 영입할 돈인데 이게 무슨 낭비냐고 한다.
맞는 말이다. 클럽을 공식적으로 매각하겠다고 선언하여 감독 자리가 장기적으로 보장되지도 않고, 이적 자금도 크게 보장받지 못할 상황에서 유명 감독들이 너나 없이 달려들만큼 리버풀 감독 자리가 매력적이지는 않다. 거론되는 풀럼의 로이 호지슨 감독이 여전히 가장 유력한 후보자다. 감독을 해고하고 새로 임명하는 데 많은 돈이 들어간다.
하지만 감독이 클럽 이사회와 불화를 일으킨 상황에서 칼자루를 쥔 건 언제나 고용인이다. 구단주와 클럽 이사회의 임원들이 잘못투성이의 인간들이라도 '어이쿠 우리가 잘못이 크니 물러나겠소'라고 할 수가 없다. 이것은 조직 구조의 문제다. 아무리 서포터들이 물러나라 물러나라 외쳐도 리버풀 클럽을 해체하지 않는 한 절차에 따라 리버풀이 다른 (선의의) 구단주에게 인수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즉, 현 상황에서 라파의 해임은 불가피했다.
물러나는 것조차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서론이 길어졌다. 요즘 더 초점이 되는 것은 라파의 지난 6년 간의 리버풀 감독 생활이 성공적이었냐 아니냐에 대한 '평가' 부분이다.
평가 대목에서도 우스운 것이 누구나 성공하기만 하는 건 아닌데도 어떤 이들을 라파가 성공적이었다는 면을 너무 부각하고, 어떤 이들은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할 대목을 왜곡하거나 축소하며 가혹하게 평가한다. 이런 차이가 나오는 건 악한인 구단주들 때문에 더 잘 할 수 있던 유능한 감독이 불합리하게 나갔다는 생각과 잘 한 부분도 있었지만 지난 시즌의 비참한 성적으로 드러나듯 라파가 리버풀 감독으로 한계에 다다랐다는 생각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라파의 성공은 흔히 이스탄불에서 이룬 역대 가장 극적인 챔피언스 리그 우승, 마찬가지로 극적이었던 FA컵 우승, 그리고 리버풀 역대 최고 승점으로 리그 우승에 근접해던 작년의 리그 성적으로 요약된다. 헤이젤 이후 챔피언스 리그에서 힘을 못 쓰던 리버풀이 04-05 시즌의 스쿼드로 유벤투스, 첼시, AC 밀란을 연파하며 우승하리라고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도 승리의 여신이 리버풀 편이라고 믿는 것 이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리버풀 팬들은 그를 '법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기적을 부르는 사람이란 양날의 칼에 다름 아니다. 기적이란 통상적이지 않은 일을 해냈다는 것이다. 허약한 스쿼드로 보통 이길 수 없는 강팀들을 이긴다는 말이다. 라파가 축구의 신이 아닌 이상 몇 번의 인상적인 우승, 라이벌 팀에 대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마찬가지로 많은 패배를 당해야 했다. 막강한 더블 스쿼드 구축이 되지 않는 팀의 숙명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축구의 힘에 벅차게 많은 경기들을 소화하기 위해서 적절한 백업 선수들이 필수적이지만 특히 지난 시즌 리버풀은 그렇지 못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토레스, 제라드가 건강하다면" 리버풀이 1위를 할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두 선수는 특히 건강하지 못했다. 지금 토레스는 월드컵 개막전 출전조차 불투명하다.
라파의 기적을 일시적 우연이 아닌 체계적인 언어로 바꾸기 위해 '라팔루션'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었다. 라파는 스페인 커넥션으로 수많은 선수들을 영입하였다. 스페인어를 하는 덕분에 토레스, 레이나, 알론소, 루이스 가르시아, 마스케라노, 인수아, 막시 로드리게스 등 스페인, 아르헨티나의 우수한 재능을 스카우트하고 끌어모을 수 있었다. 개별 선수들에 대한 평가도 감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괄적으로 성공, 실패를 논하는 건 가혹하다. 그럼에도 꾸준한 활약을 보인 건 더블 클러치를 했던 유명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레이나 하나라고 봐도 무방하다. 토레스의 재능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너무 많은 부상으로 결장이 잦았다. 마스케라노는 세계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팀의 경기력에 기여하는 부분에 의문 부호가 따른다. 알론소는 전반적으로 훌륭했지만 긴 침체기가 있었다. 루이스 가르시아는 간지가 나는 골만 넣는 문제가 있었다(그래서 사랑하기도 했지만). 인수아는 여전히 성장할 필요가 있다. 막시 로드리게스는 더 이상 2006년 월드컵의 원더 골을 넣은 그 막시가 아니다.
비록 첫 시즌에 리그 5위를 했지만 특별 조치가 이루어져 라파가 있던 6년 동안 리버풀은 언제나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하는 잉글랜드 빅 포의 일원이었다. 라팔루션은 안정적인 성적을 내는 것으로 보였지만 지난 시즌 7위로 추락하며 많은 비판을 받았고, 전술로 유명한 라파의 전술에 의문을 던지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는 세밀한 전술에 뛰어난 것으로 유명하고, 경기 중 항상 메모를 한다. 아르벨로아가 리버풀에 온 직후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 리그 원정 경기에서 왼쪽 수비수로 나와 메시를 막은 것은 유명한 전술적 승리 중 하나다. 아쉽게도 나는 전술 변화를 눈치채는데 약하고 별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토록 뛰어나다는 그의 전술을 제대로 평가할 수가 없다.
발렌시아로 리그 우승을 이끌고, 리버풀에서 챔피언스 리그 우승과 또 한 번의 결승 진출을 이룬 것은 분명 그의 전술적인 면이 크게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다만 라파도 전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는 스쿼드의 향상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알고 있었다. 리버풀의 지난 시즌 성적은 얇은 스쿼드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04-05 시즌 유럽 챔피언이 리그에서 5위밖에 하지 못했다는 것도 큰 모순이다. 그래서 발렌시아에서도, 리버풀에서도 구단주들에게 좋은 선수 영입하게 돈을 달라고 재촉했는데 그게 구단주들의 심기를 많이 불편하게 한 것 같다.
구단주들은 적은 돈으로 높은 성과를 이루는 감독을 바라지만 감독은 자신이 아무리 뛰어나도 약한 스쿼드로는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을 때 갈등이 발생했고, 팬들은 기대 이상의 성적에 열광하지만 그 스쿼드가 사실 리그 7위로 갈 수도 있음을 현실에서 목격했을 때 아픔을 느꼈다. 이건 아니라고 모두가 생각했지만 그게 현실이었는지 모른다. 약한 스쿼드가 라파가 수많은 선수를 영입하고 금세 팔아치우는 통에 생긴 것인지, 아퀼라니처럼 리스크가 큰 영입의 대가인지는 모르겠다. 어느 정도씩 이유가 될 테지만 합리적인 설명은 08-09 시즌 리그 2위의 성적이 오히려 의외의 결과라는 쪽으로 귀착될 수도 있겠다.
실패한 영입의 전형
라파가 주장하고 객관적 연구로 밝혀진 것처럼 좋은 선수들을 영입해서 높은 주급을 주는 만큼 리그 성적이 잘 나오는 게 사실이다. 리버풀에서 라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른 팀들은 큰 이적료를 한 번에 지불하며 스타 선수들을 영입하며 차이를 벌려나갔다. 리버풀은 첼시나 맨시티처럼 한꺼번에 스쿼드를 뒤엎을 만큼 많은 돈이 없었고, 단계적인 업그레이드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누구나 인정하듯 리버풀은 중심축, 혹은 척추가 훌륭하지만 사이드 쪽 자원이 취약하다. 사이드까지 업그레이드가 되어야 진정한 유럽의 강호가 될 터인데 그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지난 두 시즌 동안 구단의 천문학적인 부채는 선수 영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2년간 리버풀은 사실상 이적 자금이 없었다.
라파의 전술 능력과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많은 적이 있다. 심리전을 벌였던 무링요와 퍼거슨, 구단 이사회의 거의 전부, 수많은 저널리스트들. 무링요, 퍼거슨은 닥치고 있어 다행이지만(오히려 라파가 무링요를 비판하는 듯한 말을 하긴 했다), 구단 수뇌부의 누군가는 라파를 흔드는 말을 언론에 계속 흘렸고, 저널리스트들은 이 때구나 싶어 라파를 마구 물어뜯었다.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치면 반발이 생기기 마련이다. 라파가 완벽한 실패를 한 것도 아니고(그랬다면 진작에 해고되었을 것이다), 성격파탄자도 아닌데 비판이 지나치자 한편에서는 반발 심리로 필요 이상으로 라파의 업적을 추앙하는 결과가 나왔다.
라파는 현재 리버풀에서 성적 부진을 이유로 사실상 해고되었지만 희한하게도 막 유럽 최고의 대회에서 우승한 팀의 감독이 되기 직전이다. 라파가 부족한 감독이라면 이게 가능한 일일까? 아무리 라파가 뛰어나도 흐름 상 리버풀 생활은 끝나는 게 맞다고 말할 수는 있다. 흔한 경우니까. 클럽, 감독 모두에게 새로운 출발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외국인 감독으로서 잉글랜드 문화와 적절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것도 매끄럽지 않은 나날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이제 필요한 건 적절한 대체자를 찾는 것인데 팀이 다시 안정을 찾더라도 스쿼드의 질이 높아지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완벽한 팀이라면 선수 개개인의 능력이 모자라도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도 있지만 새로운 감독과 지금 리버풀의 상황에서 쉬운 일이 아니다. 리버풀이 예전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많은 시일이 필요하다.
※ 원래 라파에 비판적인 내용을 더 많이 쓰려고 했는데 쓰는 동안 글의 방향이 바뀌어버렸다. 다음 번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라파의 말들에 대한 글을 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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