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음 복귀일에 본 다크 나이트 라이지즈
# 영화 스포일러 있습니다.
본방 사수를 하지 않는 청취자로서 일말의 죄책감을 갖고 있긴 하나 조금전 혹시나 싶어 팟캐스트 목록에서 이주연의 영화음악이 올라온 걸 확인한 기쁨 정도는 누려도 될 듯하다. 여러 평가가 가능하겠으나 MBC 파업이 어쨌거나 종료되며 이영음이 다시 방송되리라고 예상되었으나 지난 주부터 곧바로 시작되지는 않았다. 게시판에서 월요일부터 나온다고 하길래 기다렸는데 정말 방송이 재개되었다. 겨울까지 파업이 이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기에 새로운 방송 내용을 들으면서도 거짓말 같다. 김작가님이 진행한 방송이 6월 5일 월요일에 끝났는데 그 위에 어울리지 않게 또 월요일 방송이 있다.
계획한 건 아니었으나 팟캐스트에 이영음이 복귀한 날 근처 극장에서 배트맨 시리즈의 신작 '다크 나이트 라이지즈', 국내 개봉명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봤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만든 전작들을 모두 봤기에 스토리 이해에 문제는 없었고, 긴 러닝 타임을 감안할 때 꽤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소위 놀란 사단의 배우들은 물론 미드 '로스트'나 '게임 오브 쓰론'에서 본 배우들까지 등장하며 깨알같은 재미도 준다. 킬리언 머피의 등장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생뚱맞았지만(이번에 더 심했다).
더운 여름날 몇 장면 때문에 깜짝깜짝 놀라며 시원하게 구경하긴 했는데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게 뭐 어쩌자는 건지 의아하다. 기본적으로 영화에 대한 격찬에 대한 반발감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격찬은 영화에서 심오한 윤리적 견해를 발견해서라기보단 적어도 이제와 내리게 되는 내 결론은 DC 코믹스 원작에 기반한 영상화된 '만화'의 기준에서 잘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에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만화 원작을 못 봤지만 이 시리즈는 절대 원작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 시리즈에서 기대할 가치는 그 정도 선에서 그쳐야만 할 테다.
'다크 나이트'가 첫 장면에서 조커 일당이 은행을 터는 장면을 압도적인 영상으로 표현했다면, 이번 작품은 한 술 더 떠 베인 일당이 공중에서 CIA의 비행기를 납치해서 파리 날개 잡아떼듯 옆, 뒷 날개를 떼어내고 추락시키는 쇼를 선사한다. 역시 압도적인 시작, 짜잔~하는 악당의 등장이었다. 역대 최악의 악당으로 평가되고, 절대적 어둠으로 자처하는 베인은 배트맨의 허리까지 부러뜨리며 배트맨을 패배시킬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시세등등함은 영화 막판의 반전으로 상당히 의미가 퇴색한다.
마리옹 꼬띠아르가 생각보다 덜 예쁘게 나와 왜 그럴까 싶었건만 알고보니 베인이 아니라 그녀가 라스 알 굴의 자식인 진정한 후계자, 절대악이라는 거다. 어라. 그럼 베인은 뭔가? 이 영화 마케팅의 초점은 조커를 대신할 배트맨의 적수로 베인을 내세우면서 미란다 테이트(마리옹 꼬띠아르)라는 비장의 카드를 숨겨놓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카드가 공개된 순간 영화 내내 활약한 베인의 모습은 뛰어난 선동가에서 미란다의 꼭두각시로 전락한다. 꼬마 여자애를 사랑한 절대악이라니.
고담이라는 공간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만화적 공간이긴 하나 고담이 뉴욕을 의미, 상징한다는 건 비밀이 아니다. 뉴욕이 그렇게 구제불능의 도시인지 알 수 없으나, 고담은 세계와 단절된 것처럼 그려진다. 그 망할 범죄 소굴에 왜 미국 연방정부의 개입이 없는 건가. 악당들은 왜 미국 전역이나 세계를 무대로 하지 않고 고담을 망하게 하려는 건가. 이번 작품에서는 의도적으로 다른 지역으로 연결되는 다리들을 끊으며 고담시의 고립성을 명시적으로 보여주는데 전대미문의 악당들이 걸핏하면 등장하는 그 도시에서 사람들은 왜 계속 사는 걸까. 아마 이런 것들은 처음부터 원작이 부여한 한계로 봐야할 것이다.
하필 이 영화 개봉일에 미국에서는 이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있었다. 범인의 사상이 배트맨 시리즈와 모종의 연관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그건 확인해보진 못했다. 여하간 배트맨은 총은 절대 쓰지 않는 캐릭터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스스로 베인 일당과 경찰들의 총격전을 주선하고, 캣우먼이 배트맨의 오토바이를 이용해 화력 시위를 하는 걸 방관한다. 그렇게 안 하면 스토리 전개가 안 되긴 할 텐데, 본인의 손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간접적 방식을 취하는 건 얼마나 정당화가 되는지 모르겠다. 여하간 영화는 엄청난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희한하리만치 피가 보이지 않는다. 초현대식 화기의 세례를 받은 이후 부청장이 깨끗한 상태로 얌전하게 잠자듯 누워 죽어있는 장면은 역설적으로 재미있었다.
영화에서는 악의 근원으로 영화 자막으로는 '제3세계', 내가 듣기론 아시아 어딘가가 지목된다. 라스 알 굴도 그렇고, 그의 자식 미란다, 베인 모두 같은 곳에서 출발한 악인들이었다. 정확하게 어디라고 나오진 않지만 중동의 어딘가로 보이는 지역에서. 공교롭게 꼬띠아르가 출연했던 또 다른 최근 영화 스티븐 소더버그의 '컨테이전'에서는 서구의 무차별적 개발의 결과가 근원이긴 하나 전세계 인구를 죽음으로 몰고간 바이러스가 홍콩 즉 아시아에서 번져나가도록 그려졌다. 물론 소더버그가 아시아를 비하할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순 없으나 미국인의 의식 속에서 어떤 악이 아시아에서 시작된다는 상상력이 존재하는 것 같다. 현대사에서 미국이 중동, 중국 그리고 북한과 어떤 관계였는지를 생각하면 이상하지는 않다. 생각해보면 모건 프리먼을 제외하면 영화의 비중있는 인물들은 철저히 백인인 것도 알 수 있다. 이 또한 원작의 굴레겠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배트맨이 백주대낮에 베인 일당과 경찰관들의 전쟁의 한복판에서 싸우던 장면이다. 비록 배트맨이 베인과 일대일을 선호하며 건물 속에 들어가 격리되고 말았지만 밤의 어둠 속에서 혼자 일하길 좋아했던 배트맨이 민중 속으로 들어간 투사로 변신한 것처럼 그려졌다. 사실 배트맨은 하비 덴트를 비롯한 여러 명을 살인한 혐의를 받고 있었는데 아무리 베인 일당이 고담을 장악했다고 해도 경찰들이 영화 후반부에서 배트맨에게 태클조차 걸지 않은 건 의외였다. 배트맨 체포에 혈안이던 부청장마저 배트맨의 신호를 보며 개과천선했다. 비록 덴트 살인 혐의가 있지만 배트맨이 시민의 편이라는 건 믿고 싶었다? 배트맨이 다시 시민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인과적 과정은 없는 게 아쉬웠다.
영화 개봉 이후 아름다운 앤 해서웨이(의 의상)가 인기 검색어가 되기도 한 모양이지만 난 그녀의 액션이 더 인상적이었다. 또 베인 역의 톰 하디가 누굴까 검색해보니 '인셉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미남자였다는 게 가장 대경실색할 노릇이었다. 상당히 키가 크게 그려졌는데 카메라 워크의 농간일까? 그러고보니 개리 올드만도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 출연했다. 여러 작품을 보다보면 인물들의 연기 변신 혹은 반대로 비슷한 배역을 비교해보며 재미를 느낄 수도 있다.
무심결에 읽은 영국 가디언의 '다크 나이트 라이지즈' 기사에서는 한 미국 우파 평론가가 '베인(Bane)' 캐릭터가 롬니가 84년에 세운 사모펀드 '베인(Bain)'을 풍자하는 게 아니냐는 말로 조롱을 받은 내용이 실려있다. 그 평론가도 너무 생각이 많았던 모양이다. 전작 '다크 나이트'에 대해 워낙 칭찬들이 많았지만 잘 만들어진 오락 영화라는 걸 잊지는 말아야겠다. 사실 재미있는 인기 원작 만화를 영화로 잘 만드는 게 쉽지 않다는 건 놀란 감독 이전의 산으로 가던 배트맨 시리즈가 잘 보여주고 있다. 이영음에서는 배트맨에 대해 어떤 말들이 나올까 기대하며 팟캐스트를 들어보련다.